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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rk Nov 05. 2017

그때로부터 얼마나 변했을까?

공지영-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평가원 모의고사인지, 교육청 모의고사인지, 사설 모의고사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여하튼 어떤 모의고사에서 공지영 작가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한 단락이 나왔다. 이 부분이다.



그러는 동안 세월이 갔어. 잘도 흘러가더구나. 어느 날엔가 드디어 나는 완벽하게 포기를 했어. 그래 우선은 아이들을 잘 키우자. 그러고 나자 마음이 편해졌어. 보쌈김치, 파김치, 김치도 가지가지로 담가보고, 분리수거도 열심히 하고 동대문에 가서 감을 떠다가 아이들 방의 커튼이랑 방석도 만들어주고, 남대문에 가서 장어도 사서 그걸 담아서 전철을 타고 가지고 와서는 박 감독 고아 먹이고.   

.......  

어느 날부터인가 그가 말하기 시작했어. 어쩌면 그렇게 나태하니? 내가 원하는 건 좀 더 꿋꿋한 여자야. 밖에 나가봐. 가정 가지고도 일 잘하고 똑똑한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날 기다린답시고 멍청히 앉아 술을 마시지 말고 책도 좀 읽고 그래. 난 여편네들 집에서 늘어져서 긴장 풀어진 눈으로 앉아 있는 거 제일 혐오스러워. 

혐오스럽다니....... 그가 감히 그렇게 말했어. 내 공부를 포기하고 유학을 시켜 준 게 누군데, 감독을 만들어 준 게 누군데, 성공을 하게 만들어 준 게 누군데, 어떻게 내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어떻게 감히 말이야. 내가 말했었지? 그거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나는 그의 커피가 되고 그가 배고프면 난 그의 밥상이 되었다고. 그런데 이제 그가 나보고 책 좀 읽어, 하자 나는 드디어 멍청이가 되어 버린 거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中  



문제를 풀면서 결심했다. 수능이 끝나면 이 책을 꼭 읽어봐야겠다. 그만큼 저 단락이 굉장히 흥미진진했던 것이다. 저 대사를 한 사람은 영선인데 영선의 삶을 들춰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능이 끝나자마자 책을 읽었고 독후감을 쓰기 위해 최근 한 번 더 읽었다. 당시에는 지문에 나온 저 대사가 가장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더 무서운 대사가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 혜완은 남자 몰래 낙태를 한 적이 있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 혜완은 경환에게 그때 일을 털어놓았다. 

-거짓말이겠지.

혜완은 그때 처음 배운 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 자신도 혹시나 거짓말일까 하고 여러 번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므로 경환이 마치 몸을 뒤로 젖히는 것 같은 제스처로 거짓말이라는 단어를 내뱉었을 때도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경환이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며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다시 말했다. 

-미안해, 하지만 넌 참 독한 데가 있구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中  



뭐가 그렇게 독했을까? 너 혼자 알고 있어도 될 사실을 굳이 자기한테 말해서? 여자서 산부인과를 찾아가 의사 앞에서 다리를 벌려서? 한 생명을 지워버렸는데 혜완의 태도가 너무 무덤덤해서?   


‘넌 참 독한 데가 있구나’라고 경환이 말했을 때 혜완의 감정은 어땠을까? 괜히 말했다 싶었을까, 나쁜 새끼라고 생각했을까, 자신을 부도덕한 여자라고 생각했을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1998년에 나온 책이고, 소설은 90년대 초반이 배경이다. 그러니까 혜완, 영선, 경혜는 70~8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나온 지 20년이 된 책이다. 그리고 여기 나온 세 여자의 내 엄마뻘 되는 나이가 된다. 그래서 더 아련하다.   


우리 엄마는 나이로 보면 혜완, 영선, 경혜와 비슷하지만 가치관은 그녀들의 엄마와 더 비슷하다. 평생을 아무 말 안 하고 능력 없는 아버지 뒷바라지하면서 자식 둘을 키웠다. ‘엄마의 실수는 아빠랑 결혼한 거야.’라고 말해도 피식 웃으며 뭔가를 꿰매던 엄마를 보면서 고마움과 동시에 혜완처럼, 영선처럼 소리 한번 질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 종일 바둑 채널을 보면서 녹초가 된 엄마가 집으로 오면 그제야 겨우 한번 일어나는 아빠를 보면서 혐오스러운 감정과 부러운 감정이 동시에 일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이 책을 선물해줬지만 결국 다 읽지 않았다. 당신의 이야기 같아서 답답해서 인지, 재미가 없었는지, 가치관이 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읽지 않았다. 다 읽고 나서 뭔가 번뜩하면서 아빠를 향해서, 자식을 향해서 거룩한 선언이라고 하길 바랐는데, 엄마는 그러지 않고 국이 없으면 밥을 안 먹는 아빠를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시래기를 다듬었다.   


공지영 작가는 개정 신판을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딸들, 건투를 빈다!

혼자서 가는 사람들이 많으면 실은, 함께 가는 길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여성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여성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것만으로도 가치를 인정받는 소설이다. 연극, 영화로까지 만들어져 페미니스트 혹은 남녀평등의 문제가 사회적 담론으로 발전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구절은 원시불교의 경전인 수타니파타에 나오는 시구(詩句)이다. 여기서 무소는 코뿔소를 의미한다. 왜 무소는 혼자서 갈까. 코뿔소는 눈이 안 좋아서 앞에 흔들리는 잔상이 보이면 돌진하는 동물이다. 그러니까 평생을 뭔지 모를 잔상을 향해 돌진하다가 죽는 동물이다. 그 모습이 수도승이 봤을 땐 경건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진리를 향해 돌진하는 무소.   


그러나 무소가 보는 건 진리가 아니라 허상이라는 걸 잊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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