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토마토도 묵히면 되긴 하는데
토마토 라구소스를 다 먹어서 만들 때가 되었는데 지난번에 산 캔 제품이 좀 애매해서 어떻게 할까 고심중. 고심이라지만 머리싸매고 고민은 아니고, 그냥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좀 묵직하게 나올까, 고기를 들이부어서 하긴 싫고... 이런 정도 고민이 오락가락.
장보러 마트에 갔다가 떨이상품 코너에서 이 토마토가 눈에 띄었다. 일단 가격이 싸고, 게다가 떨이로 나올 상태로구나.
전국에 흔한 파스타집들 중에 생토마토로 소스 만들어 쓰는 곳은 거의 없다. 이유는 첫 째로 비싸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건 농장에 직거래하고 대량구매 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킬로에 2500원 정도라면 수입산 캔제품보다 별로 비싸지 않은 가격. 파스타 전문점이라면 일년 사용량이 톤 단위는 되니까 이 가격에 고정거래처 뚫기가 크게 어려워보이진 않는다.
더 큰 문제는 가격보다 맛. 주로 채소용으로 사용되고, 맛보단 운반할 때 터지지 않는 것이 제1의 덕목인 시장상황에서 소스용의 진한, 그 대신 잘 무르고 무게도 적게 나가는 토마토는 매력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이탈리아 요리사들은 이런 품종 재배자들을 찾고 있고, 그 수요에 부응해서 일부 소스용 품종들이 재배가 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지만 나같이 시골에서 가끔 소량 요리하는 사람에게까지 편하게 올 시장 상황은 아니다.
로버트 드니로가 나오는 '좋은 친구들'이었던가. 이탈리아계 마피아 보스님들이 감옥에들 들어갔는데, 이들의 감옥생활은 드나들 자유만 빼곤 다 있는 호화판. 이탈리아 아재들은 밥도 직접 해먹는데 재료 조달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이다(이탈리안 답다). 토마토 소스를 만들기 위한 토마토는 '살짝 간 것'을 주문하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모티브를 잡아 갈락말락한 토마토를 사서 며칠 더 묵혔다.
그리곤 한우와 표고버섯을 감칠맛의 기둥으로 세우고.
피망과 파프리카는 같은 것. 우리나라엔 이 초록색이 먼저 소개되었고 그때는 불어인 피망으로 불렸다. 이후에 알록달록 여러색이 재배되면서는 파프리카라고 부르기로 한 듯. 색깔만 다르고 완전히 같은 종자이다. 참고로 고추와는 사촌지간이기도 하고, 미국 같은 나라에선 피망도 매운 음식으로 분류한다. 한국사람들은 피망에서 매운맛을 느끼기엔 너무 고추에 미각이 학대당한 상태지만 특정 문화권에선 이 정도면 매운 것.
향신채로는 기본의 마늘, 양파와 더불어 부추.
오늘은 양파를 조금만 넣기로 했다.
민찌 쇠고기는 소금후추간을 하고 약간 녹기를 기다려준다.
이날은 스트레스 풀기 위한 매운 음식이 생각나는 날. 그래서 마늘과 후추를 대량투하했다.
후추는 캄폿의 레드. 검은 후추와 비교하면 매운맛은 살짝 덜하지만 독특한 향이 있어서 느낌적으론 더 매운 것같기도 하다.
라구는 오래 끓이는 음식이다. 향신료와 향신채를 쓸 때 잘못 다루면 향이 다 날아간다.
첫번째 포인트는 처음 기름에 이들 향을 다 녹이는 것. 높은 온도에서는 휘발성 성분이 급격히 날아가니까 양파가 잘 볶아졌다 싶으면 불을 낮추고 향신료를 넣는 것이다. 그래서 마늘, 양파, 후추 또 무엇이든 향이 기름에 잘 녹아들면 그 때야 쇠고기와 토마토를 투입. 미역국 끓일 때 미역을 참기름에 볶는 것과 비슷한 원리랄까.
두 번재 포인트는 압력솥 사용. 밀폐해서 향을 가두어 둔다. 뚜껑 열고 몇 시간씩 휘휘 저어주는 것이 이탈리아 할머니들의 방식이긴 한데,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압력솥 없던 시대의 요리인 듯. 압력솥을 사용하면 온도를 더 낮추어도 되는 장점도 있다.
어느 정도 되었다 싶으면 그 때 가서 피망을 투하. 사실 이 때 홍고추와 월계수잎도 넣었는데 사진이 없다.
볶음밥용 야채다지기를 사용해서 거의 갈아넣었던 이전 방식과 비교해서 이번엔 칼로 다진 것이라 재료들의 텍스쳐가 다 살아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피망 같은 아삭한 재료는 먹기 직전에 넣었다.
그리곤 산초깻묵을 바스라뜨려서 넣는다. 원하는 만큼 맵고 아주 좋다. 본래 산초라면 그냥 퍼먹어도 좋을 정도다. 매운맛 중에서도 후추와 산초 같은 계열이 가장 좋다.
만족스러운데, 다만 라구소스인데 묘하게 중식 느낌이 있는 것도 사실.
강릉의 양조인 모임에도 덮밥 형식으로 내었는데 평이 나쁘지 않았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