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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Feb 09. 2018

'무의식의 바구니'...의미 있게 인생을 사는 법

'김덕영의 인문학 여행' (81)

대학교 4학년 때쯤 일이다. 방송국에서 나를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일까?' 휴대폰은 고사하고 삐삐도 없던 때였다. 당연히 모든 연락은 '따르릉' 하고 벨이 울려대는 전화기로 이루어졌다. 가끔씩 하얀 봉투에 우표와 우체국 스탬프가 찍힌 편지를 받는 것도 가능하던 그런 시절 얘기다. 직접 대면하고 연락을 하기가 쉽지 않다 보니 누군가를 통하거나, 또는 누군가의 누군가를 통해서 연락이 닿곤 했다. 학교 앞 서점에 커다란 보드판이 놓이면 저녁나절쯤엔 그 보드판 하나에 온갖 쪽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곤 했다. 직접 얼굴을 대면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던 너무나 인간적인(?) 시절이었다.


"방송국에서 아마추어 영화 평론가를 구한답니다."


영화 평론가라니?! 그것도 방송국에서 말이다. 상상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나한테 전화 온 게 맞기나 한 일인가? 혹시라도 동명이인? 아무튼 전화를 건 사람은 그 누군가의 누군가를 거쳐 온 메시지를 나한테 전달하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도대체 그 시절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왜 방송국에서 아마추어 영화 평론가를 찾는데 나한테 연락이 온 것이며......


결론부터 말해서 그 시절 나는 영화에 거의 반쯤 미쳐 있었다. 하루에 영화 서너 편을 보았고, 본 영화들은 감독부터 주연배우, 제작연도, 심지어 제작사까지 포함해서 A4지 한두 장 분량의 감상평을 썼다. 그런 작업을 한다는 것이 그 시절 나에겐 기쁨이었고, 어느 책에서 본 것처럼 생(生)의 의미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 하루 24시간이 영화 보기와 영화평 쓰기로 재구성되었다.


소파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살던 때라서 나의 영화 보기는 시스템적으로는 아주 전근대적인 모양새였다. 일단 TV와 비디오 플레이어를 벽 한가운데 놓았고 반대쪽에는 커다란 책장이 세워졌다. TV와 책장 사이의 거리는 대략 3미터 정도. 책장엔 내가 읽어야 할 영화 관련 서적들로 가득 채웠다. 물론 전공 서적이었던 철학 책들도 빼놓을 순 없다. 그렇게 구성된 책장에 솜털로 가득 채워진 쿠션을 세웠다. 그리고 담요를 하나 깔면 끝.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시선은 앞에 놓인 TV를 응시한다. 왼손에는 검은색 비디오 플레이어를 컨트롤하는 리모컨 하나, 오른손엔 대학노트와 연필 한 자루. '자. 시작해 볼까!' 스타트!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배급사 로고가 등장하고 곧이어 영화를 제작한 제작사 이름까지 이어진다.


그 시간이 제일 긴장된다. 영화 보기가 일종의 컬트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말은 그래서 사실이었다. 나에겐 어떤 숭배의 대상이고 엄숙한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경건한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세계 영화사를 탐독했다. 아니 '탐시청'했다는 말이 좋겠다. 붉은색 표지로 장식된 세계영화사 책을 펴놓고 첫 장에 등장하는 영화부터 쭈욱...... 돌이켜 보면 그걸 가능케 했던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센터 소장 님께도 감사드린다. 그 누군가 한 사람의 노력과 봉사 덕분에 이 땅에 참 많은 영화인들이 탄생했으니 말이다. 일종의 오늘날 말하는 시네마떼끄 운동이 그렇게 시작됐다.


다시 나의 영화 '탐시청'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렇게 영화를 하루에도 서너 편을 보다 보니 다 좋은데 한 가지 안 좋은 일이 생겨났다. 몸을 온돌 바닥에 눕힌 자세로 하루 종일 있다 보니 허리 중간에 욕창이 생긴 것이다. 세상에! 욕창이라니!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들이나 겪는 피부질환을 겪었던 것이다. 사실은 뜨끈뜨끈한 온돌이 원인이었다. 그런 뜨거운 바닥에 몸을 하루 종일 눕히고 있으니 피부가 탈이 날 수밖에. 그것 때문에 몇 달을 고생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방송국에서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 아마추어 영화평론가를 구하는 자리에 말이다. 라디오에서 시작된 나의 영화평론, 이라고 하기엔 좀 너무 거창하고, 대략 영화 감상기 정도라고 하자. 어쨌든 나중엔 TV 방송에도 출연했을 정도였으니 나로서는 욕창과 바꿔도 아깝지 않은 대단한 성공이었다.


하긴 남들은 한 4년 정도에 걸려 볼 영화들은 몇 달만에 해치우려 했으니 참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열정이긴 했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그렇게 움직였던 것일까? 욕창이 생기는 것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 삶을 지탱시키는 의미이지 않을까? 의미 있는 삶이 결국은 수월하고 재밌을 수밖에 없다는 그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건 나이가 많건 적건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다. 아니, 오히려 나이가 들어 무료하고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말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그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흔한 이야기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으면 된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자기를 몰라 고민하고 방황하는 자들이 어떻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쉽게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떠들고 다니면서 정신적 구루입네, 영적 지도자입네 하는 자들은 솔직히 좀 밥맛이다. 선결전제 미해결의 오류다. 게다가 그런 영혼 없는 말 몇 마디로 강연 한 번에 몇 백만 원이나 벌어가는 비양심은 또 뭐고...정작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는데.......


어쩌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그 철학적인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근본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의 욕망과 무의식은 우리를 끊임없이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뇌전도, 뇌스캔 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가 몰랐던 우리 두뇌의 갖가지 기능과 작동 방식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중에서 나의 흥미를 끄는 실험이 한 가지 있다. 벤자민 리벳이라는 신경생리학자가 실시한 실험이다. 그는 두뇌의 전기적 자극을 통해 의지와 행동, 무의식의 관계를 추적했다. 그 결과 놀라운 결과 하나가 발견됐다. 뭔가를 하겠다는 의식적인 의지가 생기기 전에 이미 두뇌 활동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거대한 무의식의 세계가 의지의 영역을 이끌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움직이려는 의지는 실제 동작이 시작되기 전 5분의 1초 먼저 일어나지만 두뇌 상의 파동은 그 의지보다 3분의 1초 앞서 나타난다."


윌리엄 어빈이라는 심리학자는 <욕망에 관하여>라는 저서에서 '이런 실험들은 우리의 선택이 의식의 차원에서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의지는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의 표면 위로 솟아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거대한 무의식의 경험들 속에서 유유히 유영하고 있는 존재들이 아닐까. 의지가 있고 행동이 일어난다고들 한다. 그 의지에 앞서는 것이 판단이고, 판단은 지성의 역할이라 믿었다. 그런데 의지가 일어나기 전에 두뇌가 작동을 하고 있다. 의지가 발생하기 이전에 등장한 두뇌 상의 파동은 결국 우리의 거대한 무의식 세계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고로. '나는 누구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은 진정 무엇인가?',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선행되는 것이 바로 나의 무의식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일단은 무조건 그 거대한 무의식의 바구니 속에 넣을 수 있는 건 뭐든 넣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바로 경험이고 체험이라 믿는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보고 입술로 맛보았던 그 모든 우리의 순간순간들이 소중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일단 무의식의 바구니에 넣어라! 무얼 넣는가는 당신의 몫이고, 당신의 선택이다. 그 안에 든 것들이 결국 당신의 인생을 결정짓는다. 의지보다 3분의 1초나 빠르게, 행동보다 15분의 1초나 빠르게......


아! 욕창까지 걸려가며 보았던 영화들 덕분에 나는 결국 방송국에 들어가 내 이름을 건 영화평 코너까지 하나 맡게 되었다. '김덕영의 영화읽기'라는 코너였다. 그 뒤 라디오에서 TV를 거쳐 나중엔 생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자까지 발탁되었으니 나로선 대단한 성과였다. 돌이켜 보면 그것도 일종의 무의식의 바구니 속에 영화들을 무조건 집어넣은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작가)





서촌의 작은 골목길 까페,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조금은 독특한 방식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같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으신 분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김덕영의 책들
서촌 골목길 까페, 그 3년의 기록, <나에겐 통의동 스토리가 있다>,
인생에서 성공이란 때론 좀 늦게 찾아올 수도 있다,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49금 장편소설 <내가 그리로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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