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속 소설(fiction in essay)
바람인가 파도인가 올드맨의 잠을 깨운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오늘도 격자무늬 창문 너머로 햇살이 눈부시게 밀려들고 있다. 하얀 시트 위에 나뒹구는 메모지와 노란색 연필들이 어젯밤 늦게까지 올드맨이 무엇을 했을지 짐작하게 만든다. 시간과의 싸움, 관념 속 상상 이동, 올드맨은 애써 자신의 기억들을 종이 위에 옮기려 했다. 단어 몇 개의 조합에 그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세상 어딘가에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그것이 자신이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와 에개 해의 이름도 모르는 섬에 틀어박힌 이유일 테니까.
올드맨은 무릎까지 미키마우스 무늬가 그려진 파자마를 입고 창문 가에 다가섰다. 흰구름이 떼를 지어 파란 하늘 사이로 미끄럼을 타듯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사그라지고 있었다. 옆집 베란다에서는 이웃집 주인 여자가 이불보를 널고 있었다. 무게 때문에 빨랫감들 몇 개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는 걸로 봐서는 그녀 역시 사는 게 지독히도 힘든 것 같다. 낯선 언어, 다른 냄새가 나는 공기, 색깔이 다른 하늘 아래 그가 서 있다. 언제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따져 묻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는 왔고, 지금은 저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이면서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옆집 여자의 째진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등을 지고 있어 몰랐지만 여자는 미인이었다. 올드맨의 시선에 이웃집 여자의 원피스 자락 사이로 힐끗힐끗 연분홍빛을 띠는 가늘고 흰 다리가 두드러지게 보인다. 빨랫감들 사이로 다리가 보였고, 다리 사이로 바다 보였다. 푸른 물결 하얀 파도가 일렁거리는 에게해의 바다. 하얀 거품이 부서지는 해변가. 어젯밤 올드맨은 넘실거리는 파도를 타고 짙은 밤색 갈기를 뽐내며 사자 한 마리가 서핑을 타고 있는 꿈을 꾸었다.
'사자가 파도를 타다니!
도대체 무슨 꿈일까?'
올드맨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나이는 몇 살 어리지만 늘 여유롭고 넉넉했던 가슴의 소유자. 아침잠에서 깰 때마다 올드맨은 그녀가 생각났다. 이부자리 속에서 잠시 동안 그녀의 흔적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작은 위로가 됐다. 가끔은 이불을 돌돌 말아 그녀의 가슴을 안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남자들이란... 사내가 된다는 것은 혼자서 잠을 자는 것이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지만, 그 말은 틀린 것 같다. 적어도 올드맨에게는 늘 같이 잠들 수 있는 여자가 필요했으니까. 어쩌면 그것이 올드맨이 요즘 들어 잠을 설치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무슨 뜻이 있는 것일까? 최근에만 벌써 일곱 번째 같은 꿈을 꾸었다.
파도를 헤치며 서핑 위에 사자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는 모습. 그녀가 옆에 있다면 해몽이라도 들었을 텐데... 올드맨은 그녀가 옆에 없는 것이 아쉬웠다. 세상 어디라도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세상 속에서 올드맨은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올드맨이 이곳에 온 것도 오늘로 101일째. 어젯밤에는 혼자서 조촐하게 와인 한 병 사놓고 100일을 기념하는 축하 파티를 했다. 그러고는 파도 소리를 듣기 위해 해변가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콧수염이 긴 주인, 이름도 잘 기어 나지 않는다, 그가 준 독주를 몇 잔 연거푸 마셨다. 기억이 파도, 달, 구름, 콧수염에서 멈춘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흔적으로 봐서는 어젯밤 침대로 돌아와서 늘 하던 대로 일기 몇 줄을 쓴 것 같다. 물론 기억은 없다. 노란색 포스트잇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는 바닥. 뭐라고 썼는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동안만이라도 상상의 시간에 머물고 싶었다. 분명 내면의 깊은 곳에서 나온 글자들일 텐데... 그걸 썼다는 것은 간절히 이뤄지길 바라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밀려오는 고독감을 이겨낼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올드맨은 도망자가 되어버렸으니까...
(계속)
글: 김덕영
* 작가는 8번째 신간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2>를 집필 중에 있습니다. 이번 책은 스토리 펀딩으로 제작되어 2018년 6월 30일 경 출간될 예정입니다. 글이 마음에 드신 분들은 작가의 신간 출간에 힘을 보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후원을 해주시는 분들에게는 저자 사인이 담긴 신간을 배송해드립니다.
스토리펀딩 링크
https://storyfunding.kakao.com/episode/37977?s=3&
[스토리펀딩] 이직과 실직을 고민하고 있는 당신께 2화.
https://storyfunding.kakao.com/m/episode/37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