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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지용 알비스 Mar 02. 2023

나 태어난 이곳에서 자폐인이 되어

파란만장 자폐인 - 3 : 2008년, 대학 OT, 자폐 공개하기

2008년, 대학 입학식 겸 OT, 이로부터 몇 시간 뒤 나는 내가 자폐인임을 공개했다

내가 장애 사실을 알았던 것이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첫 번째 확실한 진단을 받은 것이 고등학교 3학년때였으니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식날 극적으로 상명대학교에 합격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상명대학교에 입성했으니까요. (내 전공은 당시에는 사진전공으로, 졸업 때는 사진영상미디어전공이라고 불렸습니다. 네, 사진을 전공했다는 것이죠!)


내가 나 스스로 장애 사실을 공개했던 것은 2008년 대학 신입생 시절, OT를 갔을 때 최초로 제가 당시에는 발달장애인이라고 불렀지만 어쨌든 그때 장애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나 스스로 장애가 있음을 밝힌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무슨 용기가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제게는 매우 큰 다행이 되었습니다. 대학시절 장애가 있다는 것이 숨겨졌다가 드러나서 골치를 치르는 것보다 나았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대학 시절은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지나갔습니다. 학우들과 같이 작업을 하기도 했고, 대학 교수들이 지원을 해주면서 한 학기였지만 특별 장학금을 줘가면서 정신과에 다녀올 수 있게 해 줬습니다. 이때가 제게는 또 다른 전환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나 스스로 자폐를 부정했던 시절과의 작별이라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이전까지 내 자폐를 잘 몰랐습니다. 적어도 고등학교 2학년이 돼서야 자폐에 대한 단서를 찾았고 고등학교 3학년때에야 내가 인지한 상태에서의 첫 진단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결과가 바로 4학년이었던 2012년 최종 판정 및 장애인 등록이었으니 말입니다.


다른 이들도 내가 자폐인임을 공개했을 때 놀라는 자들도 있었지만 내 특성을 알려고 애쓴 이들도 있었습니다. 내 유일한 외국인 술친구, 그 유명한 따루 살미넨(그 미녀들의 수다 나왔던 그분 맞습니다)은 내가 자폐인임을 공개하고 나서도 매우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단지 따루가 현재 본국으로 역이민을 갔다는 것이 유일한 아쉬움일 정도입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이들이 내 자폐를 이해해 주고 내 정체성임을 인정해 줬습니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서 힘을 얻고, 그들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가끔씩은 자폐인임을 숨겨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특정한 장소에 출입을 금지할 때입니다. 일전에 대한항공의 프랑크푸르트 발 인천행 항공편에서 자폐인이라는 이이유로 탑승이 거절된 사건 등을 보면 그럴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나마 저는 신체적으로는 장애가 없기 때문에 무슨 ‘휠체어는, 보조견은 들어갈 수 없어요’ 이런 일은 겪지 않습니다. 다만 ‘정신질환자 출입금지’ 이런 것을 보면 살짝 긴장하기도 합니다. 자칫하면 출입금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 같이 겪게 되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운전면허 취득 문제입니다. 저는 지금도 운전면허가 없습니다. 자폐인이라서 운전면허 발급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해도 저는 정신과에서 진단이 나와야 운전면허 취득 전제 조건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정신과에 운전면허 발급 가능 여부를 물으니 그 전제가 되는 서류를 써 주지 않는 형식으로 운전면허 취득이 거부된 적도 있었습니다.


다른 직업자격을 보면 저는 가끔 눈물을 흘린다면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쨌든 간에 직업 능력에서 결격사유를 들면서 ‘정신질환자’ 또는 ‘정신적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자’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주눅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저는 언제나 ‘결격사유’로 간주되어 탈락으로 곧바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회사에 지원서를 써도 거절되는 대표적인 원인이 우습게도 내 장애 때문인 것이라고 느껴질 때, 나는 매우 큰 충격과 깊은 고민 속에 빠지곤 합니다. 내가 자폐성장애를 선택한 것도 아닌데, 자폐성장애를 이유로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 이런 판정을 받으면 언제나 기분은 울상을 짓기 마련입니다. 가끔 외국에서 그런 것을 뚫고 그런 직업에 입성하는 자폐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우리는 왜 안 되지?’ 이런 불만에 싸이곤 합니다. 예를 들어 외국에 있는 자폐인 의사조직인 Autistic Doctor International(ADI) 같은 조직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런 충격을 느꼈습니다. 한국에서는 픽션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니까요.


나는 사실 공공분야에 관심이 많아 공공기관 채용시험을 2018년부터 2021년까지 총 6번 봤습니다. 물론 그때 지원한 기관은 서로 다른 기관이었지만 가장 크게 성공한 것이 2021년 장애인고용공단 입사시험에서 대기 3번을 받았던 것이 가장 크게 성공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제게 그 대기번호는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재도전 등을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장애인 별도 채용으로 응시를 했음에도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면 믿기겠습니까? 사실 그랬습니다. 장애인 별도 채용을 해도 면접라운드까지 가는 것이 소원일 정도입니다. 나는 그나마 필기시험씩이나 치고 가는 시험에서는 거뜬히 필기 라운드는 통과하지만, 유독 면접 라운드에서 탈락을 하고 마는 비극을 경험하곤 합니다. 그런 것은 민간기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폐인임을 결국 밝히면 꽤 있는 기업 공채에서의 결말은 오직 탈락일 뿐입니다.


내가 자폐인을 공개하면 듣는 이들이 인정해 주는 비율은 아마도 반반이 아닐까 싶습니다. 교회 이런 곳에 가서 자폐인인 것을 말했을 때에는 그나마 비난을 받지 않습니다. 지금 다니는 교회는 교단 내에서는 크지만 다른 교단의 교회에 비해서는 매우 작아서 장애인 부서를 별도로 만들 필요가 없어서 오히려 그것이 편할 때도 있습니다. 나는 교회 청년회에 들어가 있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 기쁠 정도입니다. 제가 아는 다른 자폐인 기독교 신자 중 장애인 부서를 떠나 일반 청년 부서에 통합되는 것을 선호하는 유형의 당사자도 좀 봤습니다. 


일반적인 장소에서는 내가 자폐인인 것을 안 밝혀도 되는 장소라면 그만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식당이나 카페 같은 곳은 내가 자폐인인 것을 말할 필요가 없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데서 굳이 자폐인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게다가 신체적인 장애 이런 것이 없고 외국 몇몇 장소처럼 자폐인에 대한 편의 제공 규정 이런 것을 두는 곳이 거의 없으니 이런 것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내가 공공분야 채용시험 때 정당한 편의제공을 몇 가지 요구해도 실질적으로 반영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면접시험 관련 편의사항도 제공된 사례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직도 자폐인의 입사 면접 관련 지원 방안은 지침서 안에만 있는 ‘죽은 조항’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취업시장에서는 내가 자폐인인 것을 공개하면 그대로 되돌려집니다. 게다가 장애인복지법은 이것을 더 촌극으로 만든 주범인데, 장애인등급제는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 장애정도를 중증 아니면 경증으로 나눌 때 무리하고 기계적으로 구 3급을 중증으로 간주하는 법을 적용해서 졸지에 저는 법률적으로는 중증 자폐성장애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력서에 ‘법률로만 중증이고 실제 상태는 경증임’이라는 특이한 문장을 집어넣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구직할 때 이 ‘특이한 문장’에 주목하는 사례는 잘 보지 못했습니다. 법과 실제가 이제는 엉뚱한 지점에서 불일치하는 현상이 빚어진 것이죠! 나는 이것 때문에 졸지에 피해를 보기도 합니다. 장애 정도에 대한 법률 해석과 실제 상황, 이 두 가지의 부조화로 가끔 나는 내 장애를 어떤 수준이라고 정의해야 하는지 잘 모를 지경입니다. 요즘에야 ‘현실판 우영우’를 취업 캐치프레이즈로 써먹어야 할 지경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어도 취업은 쉽지 않습니다. 해외에서는 신경다양성에 걸맞은 일자리를 구호로 내걸고 ESG 등의 가치를 내걸어서 자폐인 채용에 나서는 사례는 한국에서는 그림의 떡 같은 일입니다. 요즘도 자폐인이 일자리를 가졌다는 것이 뉴스거리인 시대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자폐인이 일하는 곳이 대부분 특정 재능을 거둬줘서 일하는 일자리이거나 단순 장애인 작업장 수준의 직장이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사례는 참으로 모호한 상황입니다. 그렇게 특정 재능이 완벽히 뛰어나지 않고, 단순 장애인 작업장에 가자니 그것은 역량 낭비가 되는 것이 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정작 채용에 나설 기업은 복지부동인 태도가 여전한 것도 문제입니다. 특히 대기업과 공공분야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저는 자폐인 고용을 선도해야 하는 분야가 대기업과 공공분야라고 언제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자폐인이라는 것을 밝힐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슨 과잉행동을 하고 위험한 행동 그런 것으로 낙인찍는 것은 일단 싫습니다. 그렇지 않은 자폐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시설로 보내라는 말도 우리에게는 사형선고입니다. 자폐인을 시설로 보내는 것은 또 UN 권고안 무시이기도 해서 그렇습니다. 자폐인이라는 것은 한 가지 특별 조건일 뿐, 다른 문제가 될 일은 ‘정당한 편의제공’ 이런 이슈를 제외하면 ‘그것이 그것’ 일뿐입니다. 


한국에서 소위 말하는 오픈리(Openly) 자폐인, 즉 자폐인임을 처음부터 공개할 수 있는 자폐인은 과연 몇 명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아마 제가 한국 오픈리 자폐인 중 초창기 세대가 될 것 같습니다. 내가 1호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초창기 오픈리 자폐인 중 하나가 장지용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에서 오픈리 자폐인으로 살아간다면 정체성으로 인한 갈등은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사회적인 거부, 편견과 차별을 견뎌야 하는 불편함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자폐인의 처우 문제에 대한 스코틀랜드 당국자의 비디오 연설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면서 매우 부러운 반응을 느꼈습니다. 사실 나는 스코틀랜드에 가서 자폐 정책을 견문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을 보고 부러워했지만 또 그만한 오픈리 자폐인들이 많아서 그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픈리 자폐인으로 사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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