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섯 가을, 운전면허를 땄다.
그토록 돌아다니기 바빴던 내가 운전을 할 줄 모른다니 (심지어 면허조차 없다니) 주변에선 의외라고들 했지만 사실 엄마가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불편한 줄 모른 채 살았다. 버스 드라이브를 좋아했고, 어디든 함께 갈 수 있는 인연 혹은 상황이 있었으니까. 정신없이 살아간다는 이유로 따야지 따야지 하면서 이십 대를 지나쳤다. 어느덧 삼십 대 후반. 타이밍을 놓쳐버리니 남들 다 하는데 나는 못 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은근히 자리 잡았다. 장내 기능과 도로 주행을 한 번에 통과했다. 어, 이렇게 쉽게 딴다고? 내 손에 들어온 임시 운전면허증을 보며 그 두려움은 몇 배나 커져 있었다.
때마침 새언니로부터 '차를 새로 산 김에 타던 걸 폐차하려는데 내 생각이 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15년 된 경차였다. '좀 낡기는 했는데요. 안에는 멀쩡해요, 아가씨. 저희 이거 타고 일 때문에 지방도 진짜 많이 다녔거든요.' 차가 나오려면 3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시점이었다. 연습을 안 하면 도로 연수를 받아야 할 테지. 뭐든지 직접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지라 막 타기에 이보다 더 좋은 차는 없을 거라며 당장 약속을 잡았다.
차를 가지러 간 날, 새언니가 말한 '좀'은 말 그대로 '좀'이 아닌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도대체 어떻게 타고 다녔을지 모를 정도로 군데군데 녹슬고, 구멍 나고, 찢어져있는 차체. 열었다 닫으면 '탕!' 소리와 함께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은 문짝. 잡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운전대. 거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이드미러와 목숨이라도 걸어야 할 것만 같은 승차감……. 이 모든 것을 나만 느낀 건 아니었다. 상황상 어쩔 수 없이 그 차를 타고 시댁에 다녀왔던 남편의 첫마디. '여보,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 속도를 내면 밑이 빠져서 도로가 나타나는 줄 알았어. 웬만하면 타지 마, 제발 차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 공포감 어린 눈빛에 저절로 공감이 돼서 나는 일주일에 한 번 동네 정도만 타고 다녔다.
딱 한 번. 동네를 벗어나 삼십여 분을 달려 의정부에 있는 수목원 카페에 간 적이 있다. 왔다 갔다를 반복한 끝에 주차 다운 주차를 하고 산길을 걷는데 비로소 어른이 된 것만 같았던 날. 혼자 운전을 해서 어딘가를 가는 것은 황홀한 일이구나 처음으로 깨달았다. 사전에서 정의하는 행복이란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한다. 이 행복은 전에 없던 것이고, 무엇보다 내가 만질 수 있는, 내가 만들어낸 가능성이다. 우리가 그토록 자주 쓰는 행복이라는 말. 때로는 지겹고 때로는 당연한 그 말이 나에게 '과거의 나와는 또 다른 상태, 그러니까 내가 만들어낸 가능성이 확장되는 것'으로 다가왔다. 그래. 그래서 행복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거야. 그날은 선물처럼 나에게 알려주었다.
아직도,라고 해야 할까. 여전히,라고 해야 할까. 나는 운전을 하면서 자주 행복함을 느낀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싶을 때 가다니.' 어느 날 문득 낯설어서 그 말을 따라가 본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싶을 때 가다니. 운전을 할 줄 아니까 가능하잖아?' 따라간 김에 더 따라가 본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싶을 때 가다니. 운전을 할 줄 아니까 가능하잖아? 나에게 차도 있다니!' 아무리 작은 차여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이렇게 파고들다 보면 행복은 고구마 캐기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줄기를 당기고 또 당기다 보면, 맨 끝엔 결국 내가 심은 고구마가 있으니까. 잊고 있다가도 흙 속의 고구마를 만지듯 행복도 어루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별거 아닌데 참 별일 없이 특별해지는 일이다.
- 그렇게 처음 운전해서 갔던 카페의 숲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