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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신 케이 Jan 30. 2022

등잔 밑의 핫초코

스토리포토그라피100

스토리 42 - 등잔 밑의 핫초코


Yashica T4 Safari, Fuji C200 / Yokohama, Japan - Nov


어느 아주 추운 겨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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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선 남부터미널역에 내려서 5번 출구를 향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계단의 중간 지점 즈음.. 앙상한 몸에 휑그렁텅 다 늘어난 반팔티에 반바지만 입고 있는 노숙자 아저씨가 있었다. 당시 1월의 서울은 북극 한파가 절정인 영하 9도였는데, 허름한 여름옷만 입고 추위에 덜덜 떨며 웅크리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보자니.. 충격에 마음이 위아래로 진동하는 걸 느꼈다. 작정하고 죽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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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계단을 올라 출구를 나오니 와우- 더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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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터미널 앞에서 아주 잘생긴 청년 두세 명이 한파에 단단히 대비하기 위해 멋지고 따뜻하게 북극용 롱 패딩을 입고 서-! 유니세프 어린이들을-! 굶주린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도와달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바로 3m 거리엔 반팔에 반바지만 입은 노숙자가 추위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지구 반대편에 있는 어린이는 도와 달라고 하고 있는 이 풍경이 참 사람을 이래저래 생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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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사실 그 청년들은 그냥 직원일 가능성이 더 높을 테고, 그저 주어진 자기 업무를 하고 있는 것이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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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는 긴 장발에 굉장한 철학자 아니면 산속의 시인 같은데-

오래간만의 충격에 마음이 아팠는지.. 터미널로 가서도 계속 생각이 났다.

혹시 내가 따뜻한 커피 한잔 사주면 어떨까?

'그 커피의 카페인이 갑자기 마법을 부려서 아저씨가 시적으로, 철학적으로 꿰뚫는 아이디어를 얻게 되고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를 만큼 엄청난 시를 쓰게 되어 다시 자리 잡을 기회를 얻고- 결국에 유명인이 되어 방송에도 출연! 여차저차 대성공! 해서 오늘의 멋진 청년 이야기를 모두에게 말해주지 않을까-'

라고 상상하며 터미널 안의 던킨도너츠로 갔다.

"주문하시겠어요~?"

"아아!"

직원의 말에 정신을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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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남부터미널역 5번 출구 계단통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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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이 아저씨의 이런 모순적인 풍경을 이용한 나름의 전략이라면 성공한 것 같다.

그새 바구니엔 돈도 많이 쌓인 것 같았고. 이 정도 전략가이면 노벨상까지 안 가도 금방(아니면 이미) 재건하실 것 같다.

여하튼- 커피는 못 드실 수도 있으니.. 핫초코로 바꿔서 앞에 슬며시 놔두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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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다시 계단을 올라오니 여전히 저 건장한 청년들은 꽁꽁 싸매고서 어린이를 도와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정말 노숙자 아저씨의 전략인 걸까.

휴 정말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네-


@ 지금 몇 년 지나서 다시 돌이켜보니까 커피 사주는 것보다 제 옷을 벗어주는 게 더 적절했던 상황인 것 같습니다. 항상 이렇게 한참 지나고 나서야 '아~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깨닫습니다.



 사진들은 연도, 장소, 계절로 분류를 해둔다. 겨울이 되면 그동안 겨울에 찍었던 사진들을 리뷰해본다. 꼼꼼히 리뷰하다 보면 반성할 점도 보이고  새롭게 메모해두었던 이야기와 어울리는 사진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렇게 숨어있던 사진에 새로 생긴 이야기를 엮어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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