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포토그라피100
스토리 56 - 가을 우체국 앞에서
대한민국 모든 성인 남성들에겐 국방의 의무가 있고 군 복무가 가능한 해당자들은 물론 군대에 갑니다. 그리고 우선 군입대를 하면 기초 군사훈련을 받습니다. 처음에 1주일은 신체검사를 포함해서 이런저런 검사를 다시 하는데 어떤 이유로든 군생활에 문제가 있을 법한 사람들은 결국 다시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이제 확실히 입대가 결정 나고 나면, 1주일간은 나름대로 젠틀했던.. 교관님들이 갑자기 확- 변합니다. 정말로 확-!
민간인 물 빼기라고 하면서 여기저기서 소리 지르는 교관님들 말에 땡볕 연병장에서 엎드리고 구르고 다들 정신이 없습니다. '아 이제 정말 시작한 건가...'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훈련 내내 생각 없이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돌이켜보면.
그냥 시키는 대로만 생활하는 것에 적응하다 보니 내가 굳이 복잡한 생각 안 해도 되고, 결정도 다해주고, 그에 따른 책임도 다져주고, 운동도 규칙적으로 시켜주고 하니까.. 음- 왠지 모르게 편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잘 지내다가 어느덧 훈련의 마지막이자 꽃인 행군을 가게 되었습니다. 정석대로 꽉꽉 채운 군장을 겨우 메고서 새벽부터 다 같이 출발!
행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가을 막바지 즈음의 행군이었기에 날도 춥고 또 후반부에는 다들 지쳐서 그런지 모두가 조용하게 그저 걷고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노란 은행나무 길을 지나게 되었는데 은행나무 잎이 우수수수 떨어져 있어 사방은 온통 노란빛이었습니다. '우와 세상에 이런 길도 있네 진짜 아름답다.'라고 작게 말하는 순간, 앞쪽에서 걷고 있던 동기 형이 갑자기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반주도 없는데 엄청나게 잘 불러서, 게다가 주변 풍경이 너무 어울려서! 모두들 푹 빠져서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게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다!'라던가 이런저런 군가 등 다양한 구호와 노래를 다 같이 외쳐댔고 그 과정에서 전우애랄까 타인에 대한 이 정도의 고마운 감정, 다 같이 하는 교감의 신비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군대가 아니면 느껴볼 수 없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만나며 살면서 꽤 괜찮은 경험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차렸자세- 부동자세-일 때 교관님의 "눈알 굴러가는 소리 들린다! 누구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입장이 바뀌어보니 정말 들리더군요. 하하.
실용심리학의 한 분야인 신경-언어프로그래밍(Neuro-Linguistic Programming, NLP)에는 앵커링(Anchoring)의 자극 심기 개념이 있다. 어떤 특정한 경험에 의해 특정 단어와 특정 감정이 연결되어 해당 단어를 들으면 해당 감정, 기억이 떠오르는 현상이다. 반대로 해당 기억과 감정을 느끼면 특정 단어가 떠오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번 이야기의 경험으로 인해 '가을-군대-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세트로 앵커링 되어있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늘 당시의 행군이 떠오르고 이 노래가 떠오른다.
보편적인 심리현상이기에 잘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무언가에는 앵커링 되어있다. 혹시나 이런 순간을 만난다면 꼭 사진으로도 찍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