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 프렌들리'하게 살기 진짜 쉽지 않다!
장마가 온다더니 폭염이 먼저 온 것인지, 장마를 끌고 오는 폭염인 것인지 눈을 뜨자마자 훅 하고 더운 기운이 이불 대신 나를 덮친다. 덥기만 더우면 덜할 텐데 습한 기운이 함께 덮치는 날엔 아침에 물 한잔 뜨러 가는 길이 벌써 불안하다. 습하고 더운 기운을 빼 내려 아침부터 제습기와 에어컨을 동시에 가동한다. 아침을 차려먹기 위해 가스레인지를 켜고 음식을 하면서 공기청정기를 가동한다. 혼자 사는 집에 아침부터 벌써 몇 개의 기계가 돌아가고 있지? 생각하면 또 죄책감이 든다. 요즘은 하루 종일 거의 집에만 있어서 그런지 이 날씨를 어떻게 견뎌낼지 걱정이 더 크다. 회사로 출근을 한다는 것은 여름 낮시간을 그래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다는 보장이 된다. 작년에는 재택근무로, 올해는 일을 쉬느라 오롯이 혼자 종일 집에 있다 보니 이런 생각이 더 자주 든다. 공기청정기 필터를 교체할 시기가 됐는데, 필터는 오롯이 일반쓰레기로 분리되기 때문에 또 가슴이 묵직해진다. 필터 주문을 미루고 미루는데 그럴싸한 이유가 있다. 사람이 공기를 오염시켜서 공기청정기를 쓰는데, 공기청정기를 쓰는 것 자체가 또 환경을 오염시키는 꼴이라니.
5층 건물의 5층 집. 에어컨을 켜지 않고는 어렵다. 혼자 산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에어컨 없이 살던 때가 있었다. 집에 붙어있는 시간이 잘 없던 때라 에어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을 미처 하지 않았다. 한여름에는 일부러라도 서점이나 카페에 들렀다 밤이 되면 집에 들어왔다. 문제는 주말이었다. 매 끼니를 사 먹기가 좀 그래서 국수를 삶았는데, 갑자기 머리가 핑 하고 돌았다. 얼음물을 마시고 진정했지만 덜컥 겁이 났다. 나는 쓰러져도 금방 발견이 안 될 1인 가구 가장이 아니던가. 당장 집주인에게 이야기하고 에어컨을 설치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더우면 에어컨을 망설이지 않고 켠다.
'내가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이야.'
그리고 덧붙인다.
'이렇게 주구장창 비가 오는 건 다 나 때문이야.'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뉴스들이 하루에도 여러 건씩 쏟아진다. 미국에 이어 캐나다에서도 폭염이 이어지면서 해안가에 조개들이 패사했다는 뉴스가 사진과 함께 보도된다. 툰베리의 연설과 유튜브 콘텐츠가 알고리즘을 타고 내 피드에 계속 등장한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이라며 기후위기 운동가들을 오히려 지적하는 반대파들의 주장도 함께 눈에 보인다. 친구들을 만나 얘기를 해보면 장을 보러 갈 때는 장바구니를 들고 가야 한다는 것쯤은 이제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천하는 생활습관이 돼 있다. 어제는 망원시장에 장을 보러 갔다 장바구니를 내밀었더니 쿠폰을 줬다. '용기내' 장을 보면 쿠폰을 주는데 10개를 모아 오면 쓰레기봉투로 바꿔준다고 한다. 이 코팅종이에 컬러로 프린트된 쿠폰이 또 무수히 제작됐다 버려질 것을 잠시 생각하다가 어쨌든 좋은 취지로 사람들을 독려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사 보기로 한다.
현생이 힘들고 지칠 때는 무조건 새벽 배송이 되는 업체에서 장을 봤다. 밤늦게 퇴근을 하면서 손가락 몇 번만 까딱하면 다음날 아침 문 앞에 짠! 하고 나타나 있는 비싼 야채들과 냉동식품들, 그리고 플라스틱 쓰레기들. 쓰레기를 분리해 버리는 수고를 감수하고라도 새벽 배송 서비스를 이용했던 이유는, 퇴근시간엔 시장이 문을 닫기 때문이었다. 행여라도 문을 닫기 직전에 퇴근을 하더라도, 나에게 사과 1킬로, 양파 1킬로, 두부 한모를 양손에 들고 5층 계단을 오를 에너지가 남아있진 않았다.
코로나 이후 집에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아지면서 그나마 집 앞 시장에서 장을 볼 수 있게 됐다. 장바구니를 들고나가 장을 보면 분리수거로 내다 버려야 할 쓰레기 양이 얼마나 줄었는지! 이 짜릿함은 말도 못 한다. 여전히 시장에 팔지 않는 물건들은 아주 가끔 '마켓 컬리'나 다른 택배 서비스를 이용하지만, 그 빈도는 거의 1/10로 줄었다. 쓰레기 버리는 게 힘들어서 장바구니를 들고나간 건데, '오구오구 잘했다'라고 쿠폰도 주고 쓰레기봉투도 준다니 신이 난다.
작년부터 샴푸와 린스, 바디샴푸를 모두 고체형 비누로 바꿨다. 쓰던 제품을 다 소진하고 난 뒤 고체형 비누로 하나씩 교체했다. 액상형 샴푸를 쓸 때보다 머리에 조금 힘이 들어가는 것도 같고, 비누로 몸을 씻은 뒤에 트러블이 현저히 줄어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문제는 내가 만족했던 샴푸를 다른 제품으로 바꾸면서였다. 숯이 들어있는 제품으로 바꾸고 나니 두피에 트러블이 생겼다. 비누를 다 쓰려면 아직 한참이 남았는데. 이따금 생기는 뾰루찌같은 것들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처음 구매했던 샴푸바처럼 상쾌함도 없고 향도 별로고, 이래저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속하게도 잘 줄어들지 않는 샴푸바. 나는 기어이 이 검은색 샴푸바가 조각조각 나서 거의 없어질 즈음에야 다른 제품으로 교체했다. 마음에 드는 제품을 쓰다가도 반짝반짝 새로운 것이 눈에 들어오면 휙! 하고 바꿔버리던 부끄러운 과거를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었나 보다. 몇 주를 머리 밑을 긁다가 겨우 마음에 드는 페퍼민트 샴푸바를 선물 받아 샤워할 때마다 상쾌함을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한편으로 자괴감이 든다.
'샴푸바 하나 쓰다가 버린다고 뭐가 얼마나 달라질까...'
주방에서의 '에코 프렌들리'하기 위한 노력은 더 처절하다. 물건을 배달시키지 않고 직접 구매하는 것에 더해 키친타월과 랩, 물티슈를 안 쓰려고 안간힘을 쓴다. 키친타월은 재사용 종이로 만든 짙은 베이지색 뻣뻣한 제품을 썼다. 롤 자체가 큰 것으로 구매해서 최대한 구매 횟수를 줄이려고 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단 한 번도 챡! 하고 눈금에 따라 뜯어지는 법이 없는 것인가. 매 번 사선으로 지익 찢어지는 이 요물은 두 롤 쓰고 다시 일반 키친타월로 돌아왔다. 대신 키친타월의 역할을 키친크로스가 열심히 하도록, 내 손 한번 더 움직이면 되겠지 다독인다.
설거지 비누는 나를 더 좌절시켰다. 설거지 비누를 망에 넣고 걸어두고 쓰면 손도 확실히 덜 건조해지고, 요령만 잘 터득하면 그릇을 씻어내는데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내 지갑에 있었을 뿐. 500g짜리 큰 비누를 구매한 지 한 달쯤 지났는데 마지막 비누가 사라져 가고 있었다. 유난히 친구들이 집에 놀러도 많이 오고, 집에서 삼시 세 끼를 해먹기도 했고, 쿠킹클래스도 했던 달이라 설거지거리가 많긴 했지만, 이건 해도 너무했다 싶었다. 환경에도 프렌들리하고, 설거지 바를 만드는 회사의 운영 철학도 너무 사회적으로 프렌들리 하지만, 결코 내 지갑에 만큼은 프렌들리 하지 못했다. 그래 봤자 커피 두-세잔 값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설거지에 이 돈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었다. 1년 만에 설거지 바를 포기했다. 다시 플라스틱 용기에 들어있는 계면활성제가 포함된 세제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2리터짜리 공병을 들고나가 설거지 세제를 담아파는 곳에 가 세제를 소분 구매해왔다. 낑낑거리고 세제를 들고 집에 오는데 또 한 번 자괴감이 들었다.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뿌듯하게 차려먹은 것들을 올리고 나면 여지없이 메시지가 날아든다.
'너 빈혈 있다며. 고기 좀 먹어.'
'탄수화물을 먹지 말고 질 좋은 고기 좀 먹어.'
완전 채식을 하고 있지도 않은데, 가능한 선에서 하루 한, 두 끼만 채식을 하는데도, 그것도 혼자 먹는 밥인데도 이렇다.
'툰베리한테 혼나 ㅎㅎㅎ'
말이 길어지면 피차 괴로우니 농담에 핵심 메시지를 담아 보내 본다. 채소로 맛있는 요리를 해 먹는 것은 요즘 내가 느끼는 가장 큰 행복 중 하나다. 애써 기후위기니 동물학 대니 건강문제니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다채로운 색깔과 풍부한 맛이 주는 만족감이 너무 크다. 계절별로 다양한 채소와 과일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흥미가 360도로 뻗치는 내 취향에 아주 딱 들어맞는다. 혼자만 먹으면 재미없으니까 자꾸 남들도 채소 요리를 좀 더 많이 먹었으면 하는 마음에 오지랖을 우주 끝까지 뻗쳐 온라인으로 채소 요리를 같이 만들어 먹는 쿠킹클래스도 해보고 있다. 이달로 벌써 네 번째, 점점 레퍼토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지 불안하니까 자꾸 레시피를 공부하게 된다. 나의 인정 욕구와 ENFP적 성향이 시너지를 내고 있는 영역 중 하나다.
하루 한,두끼라도 채식으로 잘 먹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딸에게 엄마가 선물을 보내왔다. 새까만 포장지에 잘 포장된 흑염소즙 120포.
'딸내미, 이게 기력 차리는데 그렇게 좋데!! 수술하고 나서 회복하는데도 그렇게 좋단다! 매일매일 먹는 거 인증샷 보내!'
회복 다 한 것 같은데... 엄마 이제 정말 몸은 다 회복한 것 같은데...
'아기 염소 여럿이 풀을 뜯고 놀아요, 해처럼 밝은 얼굴로'
어릴 때 부르던 동요가 생각났다. 뒷면 라벨을 보니 흑염소는 겨우 2%가 들어있었다. 나머지는 물과 식물성 한약재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좋은 마음으로 먹으면 다 약이다 생각하고 아침부터 쓴 검정 물을 들이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