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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바로 덕질인가 싶다.

어쩌다 보니 Plant-based nutrition 수료증을 받게 됐다.

by 망원동 바히네

아이돌을 비롯해 '덕질'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나에겐 언제나 생경한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조건 없이 좋아하면서 열정을 쏟아낼 상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러운 적이 많다. 여전히 그렇다. 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란 말인가? 떠올리기만 해도 벅차오르고 힘든 하루의 끝을 핸드폰으로 보는 영상이나 사진만으로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이런 덕질의 대상을 굳이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요리가 아닐까 싶다. 잘하던 못하던 나는 주방에서 손을 움직이는 것이 좋다. 시장이나 마트에 가서 식재료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하루 끝의 위로가 된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생각이 들 때도 주방에서 몇 가지를 만들어내고 나면 '그래, 이거 하나는 그래도 내 마음대로 되네!' 싶은 생각이 든다. '줄리 앤 줄리아'라는 영화를 보며 '어머, 저거 내 얘기잖아!'싶었던 부분이 있다. 주인공인 줄리는 뉴욕에서 911 테러 이후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는 말단 공무원이다. 하루 종일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나보다 잘 나가는 친구들에게 은근히 무시당하고, 퇴근길 복잡한 지하철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돌아온 뒤 줄리는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었다.


내가 왜 요리를 좋아하는지 알아? 하루 종일 뭐 확실한 게 하나도 없는 날, 진짜 하나도 없는 날, 집에 와서 계란 노른자에 초콜릿, 설탕, 우유를 섞으면 꾸덕해질 거라는 걸 아는 거. 이게 진짜 큰 위로가 돼.

코로나 이후 집에 있는 시간이 그 어느 때 보다 많아지면서, 그리고 올해 두 차례의 수술을 하면서 집에서 요리를 할 수 있는 날이 절대적으로 많아졌다. 아마 이 중요하고도 거룩한 시간이 아니었다면 내가 작년과 올해를 어떻게 보냈을까 싶다. 가끔은 설탕을 잔뜩 넣고 케이크나 머핀을 구워 선물하기도 했고,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날엔 들기도 힘든 주물 더치오븐에 와인을 잔뜩 넣고 몇 시간이고 고기를 조려내는 날도 있었다. 편하게 술을 먹고 싶은 날에 친구들을 초대할 때면 핀터레스트와 인스타그램의 멋들어진 사진들을 참고해 치즈 보드를 꽉 채워 내놓기도 한다.


그러다 혼자 집에 있는 날에는 파티 후 남은 요리들을 먹거나, 남은 재료들을 활용해서 간단하게 차려먹었다. 가끔은 내가 좋아하는 생선을 사다 요리를 해 먹는 날들도 있었지만, 보통은 남은 재료들에 몇 가지 간단한 것들을 더해 먹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가볍고 건강한 음식이 주를 이뤘다. 고기를 소화도 잘 못 시키고 무엇보다 맛을 좋아하지도 않아 혼자 먹기 위해 고기를 사는 일은 없었다. 차려놓고 보면 자연스럽게 지중해 식단이거나, 심심한 한식 백반이거나, 때로는 완전 채식이었다.


채소의 다양하고 풍부한 색깔과 맛을 좋아하는데 거기에 건강에도 좋다고 하니 혼자 사는 1인 가구 치고 채소 섭취량이 적진 않았다. 그러다 수술을 하고 나서, 앞으로 내 건강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조금 더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먹는 것에 조금 더 (여기서 더?라는 의문, 공감하는 바입니다.) 주의를 기울이게 됐다. TV나 신문 같은 대중매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정보는 대부분 원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정보 중 일부만을 확대 해석하는 경우가 많고, 특히 '돈'의 압력이 있기 때문에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보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코넬대학교의 온라인 식물영양학 수업(e.Conell Plant-based nutrition)에 등록하고 있었다.


수업은 앉아서 클릭 몇 번만 하면 유명한 교수들이 나와서 열심히 강의를 해 주시고, 퀴즈는 모두 만점을 받아야 하지만 여러 번의 재시도가 가능하다. 과제를 제출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지만 영어를 완벽하게 잘하지 못해도 친절한 팀에서 잘 이해하고 '너무너무 잘했어요! 완벽해요! 아래 링크를 통해 이런 논문도 한번 더 살펴보면 도움이 될 거예요!'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수업내용은 식물기반 영양이란 무엇인지로 시작해, 질병 측면에서 왜 중요한지, 사회적(정치적)으로 왜 육식이 이렇게까지 무분별하게 늘었는지, 그리고 실제로 어떻게 식물기반 영양을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대한 내용을 공부할 수 있다. 뭐든 겉핥기보다는 약-간 더 들여다보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 딱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아마도 나는 당분간은, 아니면 평생 완전 'Plant-based diet'를 100% 실천하면서 살지는 못할 것 같다. 근거를 기반했을 때 가장 옳은 일인지는 완전한 확신이 생겼지만, 이게 현실적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자신이 없다. 다만, 가능할 때, 가능한 선에서 잘 챙겨 먹고,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이 함께 잘 챙겨 먹을 수 있도록 계속 나눠보는 것(중요).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렇게 또 한 장의 수료증이 늘었다. 이 정도면 훌륭한 덕질이라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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