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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셔보겠다고 했더니...

와인을 넣어두던 장이 차로 가득 찼다.

by 망원동 바히네

아침에 일어나 차를 마셔보기로 다짐한 이후로, 집에 있던 - 주로 커피를 추출할 때 쓰던 - 도구들로 스타벅스 녹차나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허브티를 우려 마셨다. 제대로 된 다도를 지키지도, 다기를 세트로 갖추지도 않았지만, 차분하게 앉아 차를 우리고 따뜻한 차를 마시는 그 시간이 좋았다. 의미 없는 SNS 피드 새로고침을 하지 않아도, 남들이 뭐 먹고 사는지 집착적으로 보는 브이로그를 보지 않아도, 뜨거운 물에 차가 잘 우러나고 있는지 집중하는 그 시간이 좋아서 일주일이 조금 넘게 아침에 차를 마시고 있다.


와인 대신 차를 마시겠어!

이런 결심을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와인을 공부해가면서 마신 것도 아니다. 와인을 잘 모르지만 거실 한 편의 코너장엔 늘 와인이 한 열병쯤 들어있었다. 주로는 집에 놀러 오는 친구들이 선물로 준 것이 반, 나머지 반은 혹시나 손님이 오면 내놓을 요량으로 내추럴 와인샵에서 주기적으로 사 모아 놓던 것들이 반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장 마실 것도 아닌데, 자주 가는 와인샵 SNS에서 '몇 병 없다'는 피드를 올리면 꼭 가서 구매하곤 했었다. 주로 친구들과 이런 와인을 마셨는데 '어머, 이거 또 재빠르게 가서 샀나 보네'하는 말에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와인의 맛은 늘 좋았지만, 워낙 니치한 내추럴 와인 세계는 매일 공부하듯 마시지 않으면 따라잡기 어려운 곳이었다. 더군다나 주량이 약한 나는 세 잔이 넘어가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여섯 잔이 넘어가면 눕고 싶어 졌다. 결국 와인에 대한 내 마음은 애착과 집착의 그 어디쯤에 있었다.


와인을 마시다 보면 와인잔이 종류별로 필요하고, 와인병을 막아놓을 진공 마개부터 샴페인이나 화이트 와인을 칠링 시킬 수 있는 칠러, 오프너와 에어레이터까지 다양한 소품을 갖추게 된다. 구매한 것도 있고, 선물 받은 것도 있다. 이런 와인과 관련된 모든 기물과 와인병들을 넣어놓던 거실 코너장에 이제 차와 다기를 들여놓기 시작했다. 와인이 있던 자리에 차가 비집고 들어가 공존하고 있는 코너장은 어쩌면 내 취미이자 욕망을 담는 공간인 것도 같다.

어찌 되었건 아침에 차를 마시겠다고 선언한 이후, 감사하게도 다기와 여러 종류의 차를 얻게 됐다. 내가 구매한 것은 녹차 한 종류. 나머지는 선물과 나눔으로 채워졌다. 친구가 홍콩에서 어렵게 구했다는 예쁜 빨간 개완과 집 근처에서 구매한 보이차를 가지고 왔다. 한 때 대만에서 차 유통을 하셨던 타히션 춤 선생님은 대만 우롱차와 홍차를 종류별로 선물해주셨다. 덕분에 차를 담아두는 나무상자가 꽉 찼다. 오랜만에 켠 당근 어플에서 30초 전에 올라온 '다기 나눔 합니다'라는 글을 보고 메시지를 보냈고, 나눔이 성사됐다. 밝은 표정의 어머님 한 분이 삼인용 다기세트에 더해 혹시 필요하면 가져가라며 1인용 다기세트를 더 챙겨 오셨다. 순식간에 다기와 차를 한가득 가지게 됐다. '하고자 하면 다 길이 생긴다'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저 감사한 마음이다. 요즘 감사에 대한 보답은 늘 구운 빵이나 쿠키로 한다.

나눔받고, 선물받은 차와 다기들. 부자가 됐다!
비스코티에 꽂혀서 일주일에 세 번은 굽는다. 굽는 시간을 조정하기도, 재료를 바꿔보기도 하는 재미.

최근에 이용하고 있던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인 Vibe에서 여러 도시의 소리, 명상 음원, 요리나 카페, 사찰 등지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ASMR처럼 가공해 만든 소리 재생 서비스를 내놨다. 유튜브에도 수도 없이 많은 음원이겠지만, 깔끔하게 아카이빙 되어있고, 광고 없이 연속 재생이 된다는 장점이 있다. 주로 '부석사의 풍경소리'나 ‘메밀밭에 담은 소리’ 같은 조용한 음원을 틀고 차를 마실 준비를 한다. 전기포트에 600ml 정도의 물을 끓이고, 오늘 마실 차를 고르고, 쟁반에 다기를 세팅한다. 찻잎에 뜨거운 물을 부어 차를 우려내고, 가만히 찻잔에 따라 마시는 평화로운 그림을 상상하지만, 실제로는 개완이 너무 뜨거워 이를 악물고 참다가 결국엔 옆으로 차가 질질 새기도 하는, 우스운 모양인 경우가 더 많았다. 아무렴 어떤가. 새로운 관심사에 유난을 떨며 즐거움을 하나 더 쌓아나가는 것이지. 자연스럽게 차를 마신 뒤 짧게 명상을 이어나가게 되는 루틴을 찾은 것도 장점이다.


보통 20대에 커피를 탐닉하던 사람들이 20대 중후반이 지나며 와인을 탐닉하고, 40대에 차에 몰두하다, 그 유난스러운 취미의 끝인 조향으로 취미를 마무리한다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커피, 와인, 차, 향 모두 예민한 후각을 활용하고, 원료를 생산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가공방식, 그 이후에 추출 등을 통해 만들어내는 과정에까지 모두 관심을 가지고 취향을 발견해내는 취미라는 공통점이 있다. 순서가 커피에서 와인, 차, 향으로 가는 이유는 자연스럽게 몸이 늙어가면서 카페인에 예민해지고, 간이 망가지고, 그러다 더 이상 마시는 것이 부담스러워질 때 향을 맡기만 하는 것이라고. 웃어넘겼지만 일리가 있다. 조금 일찍 차로 넘어왔지만, 아직 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아침을 시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취미인 것으로!


살도 빠지고 장도 건강해지고 콜레스테롤도 내려줄 것 같은 기대는 내려놓고, 그저 따뜻한 한잔의 차를 즐기면 된다. 세상에 만병통치약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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