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이야기가 재미없지만, 그래도 이야기하자면 나는 공군을 다녀왔다. 공군은 특기별로 자대배치를 성적순으로 한다는 말에 랜덤 방식으로 자대가 배치되는 육군보다 훨씬 더 내 선택권을 보장받는데서 결정한 선택이었다. 다행히도 그토록 원하던 집 근처 자대에 배치됐고 그 부대가 바로 국군체육부대였다. 지금은 문경에 소재한 그 부대는 내가 군대에 다녀왔던 그때에는 지금의 위례신도시 지역에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하는 일은 운동선수들의 행정병이었고, 마치 대한체육회 말단 직원 같은 일을 했었다. 25가지 운동종목의 선수들이 군대의 공백을 느끼지 않고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그곳에서 직접 운동선수들과 호흡하고 마주할 수 있는 보직은 몇 개 안 됐는데, 운이 좋게 나는 그 보직을 부여받았다. 내가 관리했던 운동종목은 기록 종목이었다. 육상, 수영, 사이클, 양궁, 펜싱, 사격, 근대 5종까지 어찌 보면 비인기 종목이었지만 우리나의 효자종목들이었고 난 그곳에서 프로선수들이 얼마나 고강도의 훈련을 하는지 목도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기록 종목에 대한 친숙함이 지금 달리기를 할 때나 가끔 자전거를 탈 때 남들보다는 덜 겁을 내는 이유일 것이다.
기록 종목이라는 것은 사실 다른 경쟁상대들과 함께 경기를 하긴 하지만 결국엔 숫자와 통계로 이루어진 극한의 스포츠다. 어제의 나를 이기는 일. 매일 한계에 도전하는 일. 그 어떤 우연도 없이 결국 나의 재능과 노력이 더해져 성과를 만드는 일. 그렇기에 달리기는 어찌 보면 시작도 기록, 끝도 기록인 것이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한 동안은 가벼워진 몸에 빨라지는 기록이 동력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1차 한계선쯤으로 생각되는 경계에서 그 한계를 깨기 위해 들이는 노력과 시간들의 효용을 따지게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더 빠르게 달리고, 더 멀리 달리는 것에 의미가 옅어지면서 유일하게 내게 남은 달리기 기록은 한 주에 얼마나, 한 달에 몇 킬로미터를 달렸는지다. 적어도 이 기록은 누군가와의 경쟁이 아니거니와 나의 한계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성실히 살고 있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이 되고 있다.
가민 포러너 시리즈 중 보급형인 45를 구매해서 2~3달 사용한 뒤, 상위 모델인 235를 코스트코 연말 할인으로 16만 원대에 구입해서 3년 넘게 잘 쓰고 있다. 지금 새로 나오는 265 모델이 50만 원 대에 판매되는 걸 보면 놀라우면서도 다행이다 싶다. 아무튼 이 시계 하나 덕분에 나는 달리기의 속도와 거리, 심박수, 보폭, 케이던스 등 각종 지표를 통해 통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새겨진 나의 달리기 로그도 벌써 4년이 되었고 매해 1,500km 이상 달려오고 있으면서 건강한 삶의 마지노선은 지키게 된 것이다.
또 모른다. 언젠가 다시 PB에 도전하고 기록에 목매게 될지는. 하지만 지금은 그저 어제의 내가 한 결심을 지키는 오늘의 나를 위해 기록하는 달리기를 이어나갈 뿐이다.
#메멘토모리
내게 영향을 많이 준 친구는 본인의 삶을 시간단위로 기록한 지 몇 년이 지났다. (https://brunch.co.kr/@yunyounghoon/3) 이 친구의 사이드 프로젝트 격인 '메멘토모리'는 내 모든 시간을 기록해 의미를 더해가는 작업이다. 얼마 전부터 나도 이 웹페이지를 통해 나의 24간을 기록하고 있다. 인생을 계획적으로 사는 것도 모자라 그 시간들을 기록하고 통계를 내 개선하는 작업을 이야기했을 때 대부분의 지인들은 혀를 내두르긴 했다. 나도 사실 어제를 곱씹으며 시간단위로 기록하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평일은 다니는 회사 덕분에 (?) 그럭저럭 루틴 한 삶을 반복하는 지라 기록이 그리 어렵지 않지만, 주말은 정말이지 뭐 하고 지났는지 모를 만큼 순삭이라 월요일 아침에 주말을 복기하며 막막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대체 뭘 했는지 모르게 지나갔는데 이 시간을 뭐라고 정의하고 기록해야 하지? 이런 고민에 빠지게 된다.
아직 정식으로 앱 출시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몇몇 지인만 사용하고 있는 웹페이지지만 나름 편의성이 있고, 시간의 카테고리도 개인이 설정할 수 있어서 나의 시간을 유형별로 나누고 기록하는 재미가 있다. 기록은 귀찮은 일이기도 하지만 지난 하루를 반추하는 일이기도 하기에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하다. 단순히 하루하루 기록할 때는 느끼지 못하지만 기록이 쌓여 1주일, 1 달 단위로 내가 어떤 유형의 시간을 얼마큼 보냈는지 확인할 때는 또 다른 감정을 느낀다. 지난 한 달간 잠을 제일 많이 잤구나. 그다음은 일을 많이 했구나. 그다음은 사람 만나는 거였구나. 운동은 이번 달에 별로 안 했네. 이직한 뒤에 이동시간이 더 늘어났네. 등등 이런 기록들은 앞으로의 인생에서 내가 어떤 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그 시간에 얼마나 몰입해야 하는지에 대해 계속 상기시켜 준다. 그로 인해 짧은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렇다고 모든 시간을 텐션 높게 열심히 산다는 뜻은 아니다. 유희를 즐기는 시간도 계획을 하고 즐기는 것이 훨씬 강도 높은 휴식과 재미를 보장한다는 이야기다. 보통의 사람들이 밤 시간에 핸드폰이나 TV에 빠져 있는 시간은 사실은 말 그대로 '킬링타임'이다.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주말이나 저녁시간을 활용해 어떤 시간에 볼지를 정하면 똑같은 콘텐츠를 보더라도 다른 콘텐츠를 추가적으로 보게 되면서 발생하는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다. 또한 TV 편성표에 의거하여 수동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OTT 또는 YouTube를 통해 내가 보고 싶은 콘텐츠를 보고 싶은 시간에 주도적으로 계획해서 볼 수 있게 된다. 노는 것도 시간을 정해서 놀면 한계효용은 높아지는 것이다.
시간 기록을 하다 보니 주말에 대한 나의 태도 역시 달라졌다. 주말이 오면 이유 없이 설레지만 항상 속절없이 흘러가버렸는데, 이렇게 지나간 주말은 도저히 기억에 남지 않아 기록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주말에도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평일에 먼저 계획을 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토요일 오전에는 아이를 데리고 키즈카페를 갔다가 오후에는 문화센터에 가는 계획, 일요일 오전에는 야구를 갔다가 점심때 친구 결혼식을 들렀다가 축구를 하러 가고 나서 가족과 본가를 방문하는 일정들. 그 와중에 책을 읽는다거나 자전거를 타는 시간까지 미리 정해 놓으면 주말에도 타이트한 일정을 소화하며 지낼 수 있게 된다. 주말에 퍼질러 자고 싶으면 토요일은 12시까지 침대에 있기를 계획하면 또 그만이다. (물론 애가 있으면 불가능한 계획이라 나에겐 해당사항이 없지만) 쉬는 것도 노는 것도 결국 계획하고 실행하고 달성하거나 실패하면서 하루하루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속에!
듣기만 해도 피곤하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이런 삶의 방식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다만, 단 한 사람이라도 내 글을 읽고 삶의 방식을 새롭게 적용해 보고 효용을 느낀다면 좋겠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고 죽기 전까지 해보고 싶은 건 너무 많기에 나는 앞으로의 인생도 하루하루를 의미를 더해가며 살아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