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또래 사람들에게 조카가 생기기 시작했다. 친구나 친한 동료 중 아이를 가지는 사람들도 생겼다. 원체 아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임신 계획이나 육아에 관한 이야기도 재밌어하는 쪽이었다. 그럼에도 왠지 나는 조카 바보가 안 되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프로필 사진을 조카로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하는 확신도 있었다.
실제로 언니가 임신을 하고 그 확신은 현실이 돼가는 듯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설렘보다 언니와 형부가, 특히 주 육아자가 될 언니가 걱정되어 집에 가는 길 차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소매로 찍어내는 이상 행동을 했다. 태아 초음파를 같이 보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린 것 역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아닌 언니 가족에 대한 걱정이 기반된 형용할 수 없는 감정 때문이었다. 임신 중 언니에게 일어나는 신체적인 변화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커졌고 육아를 하면서 언니네 부부가 감당해야 할 피곤함, 스트레스, 경제적 압박, 책임감을 잘 다룰 수 있을 지에 대한 걱정이 지배적이었다. 신생아실에 있는 아이를 보면서도 행복의 감정보다 온몸이 퉁퉁 부은 언니를 보는 슬픈 감정의 무게가 훨씬 컸다.
산후 조리원을 퇴소하고 본격적인 육아가 시작된 후 아이를 봐주러 엄마와 혹은 혼자 자주 갔다. 사실은 힘들어하는 언니를 봐주러 갔다. 업무 스트레스로 위경련을 매일 같이 달고서도 맛있는 음식을 포장해서 언니네로 향했다. 주말이면 언니네 부부 둘이 몇 시간이라도 데이트하라고 독박 육아를 자처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이가 뱃속에서 자라나고 있을 때도, 태어났을 때도 실재하는 하나의 완벽한 인격체로 제대로 받아들인 게 아니었던 것 같다. 나에겐 언니와 형부, 그 둘만 보였다. 가족의 형태가 변하면서 혹시나 둘의 관계가 변할까 봐, 다른 이유에서였지만 어린 시절 나의 부모처럼 싸우고 또 싸울까 봐, 옆에서 조마조마하며 자매애로 포장해 언니를 0.1이라도 돕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한편으로는 나의 현실이 아니라는 이기적인 안심을 하면서 말이다.
아이가 생후 100일이나 됐었을까. 언니네 부부를 영화관 데이트하라고 보내 놓고 아이와 둘이 집에 있는 날이었다. 평소처럼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이고, 트림시키고, 재웠다. 끊임없이 버들쩍거리는 아이에게 말을 걸다 노래를 불러주려 두 손으로 안아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잠에서 막 깬 아이의 하얗다 못해 푸른빛을 띠는 흰자와 우주처럼 까만 검은 눈동자가 날 향했다. 한참이나 가만히 앉아 눈을 맞췄다. 눈물이 났다. 아이는 여전히 내 눈을 보고 있었다. 짜고 미지근한 액체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초점도 못 잡는 아이에게 나는 하나의 검은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분명 뭔가를 가득 받은 느낌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 후론 조카가 보고 싶어서 갔다. 언니가 보내주는 조카 사진에 희한하게 일 할 힘이 생겼고, 짧은 영상 통화를 하며 하루 웃은 것보다 많이 웃었다. 새로 배운 몸짓 하나, 옹알이 하나 보겠다고 매달렸고, 아이가 어설픈 행동이라도 하면 온 가족이 뒤로 넘어지게 웃었다. 혼자 있어도 조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방금 헤어져놓곤 영상통화로 또 보여달라고 졸랐다. 조카를 두 팔로 세게 안고 목에 얼굴을 묻으면 아기 냄새와 섞인 사랑의 달콤함이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여전히 언니네 부부에 대한 걱정은 된다. 복직하면 아이를 어떻게 할지, 훈육에 대한 의견이 다르면 어쩔지 주제넘은 생각이 종종 든다. 하지만 이젠 언니, 형부, 조카 이렇게 모두가 보인다. 걱정의 끝이 전처럼 무겁지 않다. 무엇보다 이 작은 핏덩이가 '이모'라고 부르며 달려와 안길 때 느끼는 사랑은 모든 게 다 잘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나는 생에 처음 눈을 보고 신난 조카의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해놓고 두 돌 생일 선물로 산책하는 아기 상어가 나을지 날 따라오는 신기한 아기 상어가 나을지 고민하고 있다. 사랑받아야 마땅한 이 아이를 지켜주기 위해 나는 오늘도 유난스러운 이모가 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