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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독 9일차] 삶의 일회성, 찬찬한 관계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은유 <해방의 밤>

by 윤서린

새벽 5시다. 독서를 하기 위해 기상 시간을 한 시간 앞당기자 변화가 생겼다.

씻고, 머리 말리고, 외출복 차림으로 책상에 앉는 시간 15분 미션을 성공한다.


새벽독서 후 글 연재하고 정신없이 아이 등교시키고 바로 출근하는 루틴이다 보니 나의 생체리듬도 그 변화를 눈치채고 제 살길을 찾은 것 같았다.


며칠 동안 시간에 쫓겨서 큰 근심을 내려놓으러 화장실에 갈 시간이 부족했는데 나의 장기들이 알아서 루틴을 2시간 앞당긴 것이다. 여하튼, 가뿐한 몸과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사랑의 의미, 로고드라마, 삶의 일회성>을 읽는다.


우선 작가가 정의하는 '사랑의 의미'는 이렇다.

"사랑으로써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과 개성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실현돼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사랑의 힘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돼야 하는지를 깨닫게 함으로써 잠재 능력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67면)


그러고 보니, 우리가 자녀들에게 바라는 게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잠재력을 찾아 마음껏 펼치며 사는 모습. 그렇기 위해 아이의 잠재 능력을 부모가 세심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마음의 레이더가 항상 켜져있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아이의 숨겨진 잠재력은 무엇일까?

나는 아이가 자신의 잠재력을 믿을 수 있도록 어떤 깨달음을 아이에게 알려줄 수 있을까?

그래서 그 잠재 능력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부모로서 어떻게 조력할 수 있을까?


작가는 사이코드라마 속 예시를 들어 "삶의 의미"를 우리에게 되묻는다.

열한 살짜리 아들을 잃고 괴로워하던 엄마가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큰아들과 자살을 기도한다. 그런데 그 자살을 막은 것은 장애를 가진 큰아들이었다. "그는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에게 삶은 여전히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어머니는 그렇지 못한 것일까?" (173면)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돌아서 눈을 계속 깜빡여야 했다. 결국 안경을 벗어야 했다. 입김대신 눈물로 뿌연 안경알을 닦으며 생각했다.


'아이야, 너는 이미 그 의미를 찾아서 다행이다.

나는 지금 삶의 의미를 간절히 찾고 있어. 나도 너처럼 "삶의 의미"를 꼭 찾고 싶어.'



감정에 묻히기 전에 얼른 다음장을 펼친다.

<삶의 일회성>에서 작가는 "로고테라피"(주 1)는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일회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염세적인 아닌 오히려 적극적인 것이라 보았다.


여기서 "달력"에 대한 예시가 나온다.

염세주의자는 자신의 인생이 일회성이라는 생각으로 매일같이 달력을 한 장씩 찢으며 그것이 얇아지는 것을 두려움과 슬픔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비슷하다 말한다.

하지만 삶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 즉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떼어 낸 달력 뒷장에 중요한 일과를 적어 놓고, 그것을 순서대로 깔끔하게 차곡차곡 쌓아 놓는 사람과 같다'라고 말한다. (179면)


그렇다면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게 묻는다.

어제까지도 벌써 3월이 지나가고 있다고 아쉬워하던 나였다. 시간이 너무 속절없이 빠르다고.

그런데 이 글을 읽고 보니 나는 3월 3일부터 달력 뒷장에 중요한 일을 적어두는 사람처럼 이렇게 매일 책을 읽고 내 생각과 좋은 문장을 차곡차곡 기록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읽고, 쓰면서도 잊고 있는, 아니, 자각하지 못하는 내 삶을 이 문장이 오늘 내게 와서 나를 증명하도록 해줬다. 감사하다. 내가 날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읽고 싶은 책 3월의 독서모임책, 은유 <해방의 밤>을 다시 펼친다.



은유 작가가 말하는 "찬찬한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나도 요즘 지인, 친구, 가족들과의 관계의 변화가 생기고 있다.

나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삶으로 바뀌면서 인간관계에 집착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예전에도 별반 어울려 돌아다니거나 모여 다니는 걸 좋아하진 않았지만)


꼭 주기적으로 만나야 한다거나, 명절에 다들 보내는 예의차린 인사말은 굳이 보내지 않아도 되는 사이. 멀리서 서로를 조용히 응원해 주고 기다려주며 오랜만에 보아도 편안하고 너그러운 관계. 그런 관계를 원하게 되었다. 그저 멀리서 느슨하게, 작가의 말처럼 찬찬하게 단단하게.


작가는 작은 책방들과의 인연으로 좋은 만남을 이어가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곳에 가면 "삶의 근원이 환기"된다고 한다. 그러면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하는 질문이 밀려온다고 한다. (74면)


먼 훗날의 나를 생각해 본다.


나는 어디서는 정하지 못했다. (그저 맨발로 비 온 뒤 땅을 디딜 수 있는 마당과, 햇살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이 있는 곳, 그 창밖으로 나뭇잎과 이름 모를 들꽃의 꽃잎이 흔들리는 게 보이고 새가 찾아와 노래하는 곳. 하늘의 구름과 노을이 나를 안아주는 곳, 그런 곳을 꿈꾼다)


나는 누구와도 정하지 못했다. (네 명의 자녀들과 '창작하는 공간'을 공유하며 각자 살고 싶다는 생각도 최근에 했다. 근데 아이들이 싫어할 수도 있다. 남편은 시골에 가면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싫다고 한다. 결국 나 혼자인가?)


나는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는 어렴풋이 정했다. (아니 정해져 있었다. 어려서부터 늘 내 머릿속에, 가슴속에 살았던 "글 쓰는 그녀"와 함께 글을 쓰고, 텃밭을 가꾸고, 창가에 들어오는 해를 받으며 책을 읽다 꾸벅꾸벅 졸 것이다. 늘 상상 속에서만 살았던, 조금은 쓸쓸해 보였던 그녀와 내가 드디어 서로가 서로임을 알아보았다. )



나는 누가 내게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냐고 물으면 "없다"라고 단호히 말한다.


나는 시련을 이겨내고 있는 지금의 내가 좋고, 앞으로의 이런 나를 더 좋아할게 될 것 같아서다.


상상 속 그녀를 만나 하루 종일 재잘거리고 책 읽고 글 쓰다 꾸벅꾸벅 졸고 싶다. 얼른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아... 초등학생 막내 등교시간 알람이 울린다. 일어난 지 벌써 3시간 40여분이나 지나있다. 왜 이리 시간이 순삭인지... 자, 오늘도 허드렛일로 나를 일으켜보러 출발하자.

참고>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2024 개정판 9쇄

참고> 은유 <해방의 밤> 창비 2024 2쇄

주 1> 로고테라피 (logotherapy), 의미치료란 신경학자이며 정신과의 의학자인 빅토르 프랑클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빅터 프랭클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움직이는 동기를 '의미에의 의지'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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