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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사진들이 만들어 낸 타임캡슐을 찾아서…

by 윤서린

2024년의 겨울은 작년보다 더 더디게 찾아오는 것 같다.

11월 25일인데 아직 첫눈이 내리지 않았다.

작년에는 언제 첫눈이 내렸더라? 첫눈 오는 날 난 뭘 하고 있었지?

기억이 통째로 날아간 듯 첫눈의 기억대신 뇌가 망각으로 하얗게 덮인 것 같다.


휴대폰 사진첩에서 “눈”을 검색하니 159개의 이미지 결과가 나오는데 첫눈 오던 날에는 사진을 안 찍었는지 2023년 눈의 기록은 12월 20일이 처음이다.

그 사진을 보니 큰 딸과 내가 함께 집 앞에 쌓인 눈을 손수 밀고 쓸었는데 시간은 오전 7:02분. 아마 밤사이 눈이 많이 내려 집 앞에 쌓였던 모양이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때 그 시간의 찬 공기가 조금씩 되살아 나는 듯하다.


사진에 찍힌 시간을 보니 우리가 왜 이 시간에 나갔는지도 떠오른다.

누군가가 밀대로 드르륵 드륵 눈을 밀어 청소하는 소리가 아침 공기와 부딪혀 내 단잠을 깨웠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다가구 주택인데 눈이 와도 다른 층의 이웃들이 아무도 눈청소하러 안 내려온다.

그러면 골목이 꽁꽁 얼어서 걸어 다니기 힘들고 누군가는 엉덩방아를 찧는데 그게 우리 가족이 되는 건 싫으니까 우리가 대표로 총대를 메고 눈을 쓰는 것이다.

우리 옆집과 맞은편 집도 역시 다가구인데 우리가 청소하는 소리가 들리니 누군가 살짝 창문을 열어 확인했다.

곧 내려와서 같이 치우려나 싶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내려오지 않아서 나와 큰딸은 그 집 앞과 맞은편 집, 옆집까지 총 네 집 앞의 눈을 치워야 했다.

밀대를 바닥에 놓고 신나게 달려 한쪽에 눈을 쌓고 또 달려가 밀고 다시 쌓고를 반복했다. 우리는 추운데 땀이 난다며 깔깔거렸다.

열심히 눈을 밀대로 밀고 초록 빗자루로 비질을 하는 큰 딸을 불러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의 딸은 검은 패딩을 입고 모자를 덮어썼는데 반바지에 쪼리를 신고 포즈를 취했다.

역시 청춘은 좋구나. 한겨울에 반바지와 쪼리라니. 지금 봐도 웃음이 나온다.


다음 눈 사진은 열흘 후 12월 30일이다.

이때는 아이들과 3단 눈사람을 만들었는데 큰누나와 작은누나가 늦둥이 넷째를 위해 귀찮지만 추억 만들기에 동참해 준 귀한 사진이다.

넷째는 10살, 한참 눈 오는 날을 기다리는 초등학생인데 성인이 된 누나들은 큰 감흥이 없다.

나 역시 내일 길이 질퍽해져서 걷기 힘들다거나 길이 미끄러워서 운전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먼저 드니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늦둥이의 추억을 위해 한껏 설렘을 쥐어짜 눈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었다.

이때 눈사람 눈동자는 검정 올리브, 코는 빨간 건고추, 머리는 오렌지 슬라이가 모자처럼 앙증맞게 올려져 있다.

이처럼 별거 아닌 잊고 지난 사진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우리와 다시 만나게 된다.


보지도 않을 사진, 뽑지도 않을 사진을 왜 이렇게 찍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삶이 너무 바쁘고 복잡하니 행복하거나 슬펐던 일은 내 기억 한편에 쌓였다가 금세 폐기되는 것 같다.


요즘은 영상을 짧게 찍는다.

사진만으로 포착되지 않는 그 순간의 공기, 웃음, 목소리, 표정, 몸짓, 햇살, 바람을 함께 담아두기 위해서다.


큰 애들이 어렸을 때는 캠코더로 촬영을 많이 했었다. 그때는 디지털카메라가 나오기 직전이어서 촬영한 테이프만 수십 개였다.

그런데 디지털카메라가 나오고 휴대폰의 카메라가 좋아지면서 캠코더는 기억 속에서 잊히고 다시 꺼내 보지 않은 채 상자 안에서 잠들어있다.

테이프를 휴대폰 사진첩 보듯 쉽게 꺼내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 시절 아이들의 표정, 목소리가 그립다.


12월에는 아이들과 휴대폰 사진첩 사진과 영상을 함께 보며 그때의 우리를 다시 불러오고 싶다.

아마 늘 그렇듯 자기들 모습이랑 목소리가 나오면 부끄러우니 틀지 말라고 실강이하는 누군가와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모습이 웃겨 죽는다고 깔깔거릴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거 언제 찍었어?” “완전~ 기억에서 사라졌네… 뭐지?” “아, 맞다. 기억난다 여기~” 이러며 추억에 잠길 것이다.


찍어두고 잊힌 사진들이 타임캡슐처럼 우리들의 휴대폰 사진첩에 잠들어있다.

우리 지구에 있는 수억 명의 모든 사진첩을 타임캡슐처럼 동시에 같이 열어보면 몇 초의 시간과 시간이 조각조각 이어져서 오늘 앞에 과거인 그날이 영화처럼 우리에게 펼쳐질 것 같다.

그 영화의 장르는 행복과 슬픔, 유머, 상실, 죽음과 탄생, 설렘, 고난, 도전, 감사의 순간, 좌절, 휴식이 뒤섞인 한 편의 다큐멘터리일지 모른다.

과연 안그래님들의 사진첩에는 어떤 인생 영화들이 타임캡슐처럼 묻혀있는지 궁금해지는 밤이다.


모두에게 각기 다른 이유로 빛났을 그 시절의 타임캡슐을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열어보는 11월, 12월이 되길 소망하며…

나는 오늘도 기억이 추억이 되는 순간을 알알샅샅이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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