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기 158일 차] [상처받지 않고, 상처 주지 않는 관계의 기술
본인만 상처받았다고 느끼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다
우정은 어려운 삶의 과제
_볼프강 크뤼거
모든 관계는, 상대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심지어 요구하지만 그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본인만 상처받았다고 느끼지만, 그건 상대로 마찬가지다. (238면)
"친구"라는 특별한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내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몇몇 얼굴이 떠오르고 마음속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반복해 본다.
내가 생각하는 "친구"에 대한 정의, 기준이 너무 높기 때문일까?
접는 손가락이 하나에서 둘로 잘 넘어가지 못한다.
서로가 어떤 상황이든 한결같은 마음일 수 있는 사람.
함께 기뻐하고 위로하고 걱정하고 응원해 주는 사이.
하물며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사회의 기준이 아닌
"그럴 수 있어"라고 포용하고 인정해 줄 수 있는 사이.
몇 년에 한 번 보더라도, 분기에 한 번 연락하더라도 편하고 안정감 있는 사이.
이 기준으로 서로가 서로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때, 그때야 비로소 "친구"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렇다 보니 손가락이 하나만 겨우 접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나 또한 누군가의 진정한 "친구"인지 매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상대에게 온전히 그러한 존재인지.
내가 친하게 지내는 몇몇의 사람들은 내 기준 "친구"가 아닌 "지인"이다.
내 안의 "친구"의 기준이 이렇게 높다는 걸 모르는 나의 "지인"들은 서운해 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가 나눈 이야기, 함께한 시간, 서로의 향한 마음 그 모든 것들이 그저 "지인"이라는 단어로 헐값에 매도당해도 되느냐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친구"에 대한 나만의 기준이 높듯이 "지인"에 대한 나만의 기준도 꽤 높기 때문이다.
"지인"이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내 마음은 이렇다.
기꺼이 함께할 "시간"과 "에너지",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지인이다.
그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소중하고 서로를 더 알아가고 싶다는 의미다.
내가 그들과의 관계를 "친구"가 아닌 "지인"으로 정의하는 건 어쩌면 "기대와 실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인지 모른다.
상처받을까 관계에서 한 발 물러서 있는.
일종의 자기 방어 같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조용히 혼자 에너지를 충전해야 하는 나.
그럼에도 내 삶에 충만함을 더해주는 내 옆에 소중한 지인들이 함께한다.
굳이 그들을 "친구"라는 이름 대신 "지인"이라 부름은
우리의 관계가 앞으로 더 깊어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둔 나의 어설픈 인간관계론에 대한 변명이랄까.
어제저녁 불시에 "지인"의 연락을 받고 약속 장소로 뛰어간 나.
오해 속에서 멀어졌다 다시 이어진 우리이기에 전보다 더 속 깊은 이야기가 오간다.
"괜한 기대로 서로 실망하지 않기"에 합의.
너와 내가 다를 수 있음을, 너와 내가 서로 같은 상황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음을, 인정하기.
속상한 마음 위로받고 싶으면 그때가 언제이든 연락하기
하지만 상대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 못 만나게 되더라도 서운해하거나 상대의 마음 오해하지 않기
같은 나이
같은 취미
같은 동네
우리의 관계는 "지인"에서 "친구"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지만 서둘러 "친구"라는 이름을 덧입히지 않기로 한다.
서서히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관계
그렇지만 그래도 충분히 좋은 관계.
이것이 삶의 어려운 과제인 인간의 관계에 대한,
나만의 "친구"와 "지인"의 정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