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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갇혔다

살다 살다 이런 경험은 또 처음.

by 윤서린

+ 7개월 만에 다시 돌아온 늘그래 작가의 우울증 극복 설거지 아르바이트 도전기 +


모처럼 <허드레꾼의 허튼 생각>의 연재를 한다.

다시 돌아오기까지 무려 7개월이 걸리다니.

<독서처방과 밑줄프로젝트>를 통해 최근 내 글을 구독하신 분들은 이 글의 거침없음에 좀 당황하실 수 있겠다.

그렇다. 이 글은 윤서린이 아닌 늘그래(브런치스토리 초기 필명인 또 다른 나)가 쓰고 있다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

허튼소리 잘하는 내 안의 내가 쓰는 현실 아르바이트 이야기.


그동안 한차례 아르바이트 자리 이동이 있었지만 그 썰은 나중에 풀기로 하고 오늘 있었던 일을 쓴다.


오늘 완전 대박 사건이 있었다.

나는 평일 주 5일 오전 9:30-2:30분까지 음식점 주방에서 설거지와 재료 손질을 한다.

어느덧 이곳에서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2년이 지났다.

나름 주방에서 고참인 나를 딱히 터치하는 사람이 없어서 큰 스트레스 없이 일을 할 수 있다.

요즘처럼 손님이 많이 없는 날에는 미리 부족한 재료가 무엇인지 파악해서 손질하는 나름의 여유도 생겼다.


나한테 손님이 많이 있고 없고의 판단 기준은 12시~12:30분 사이에 화장실을 다녀오며 한숨 돌릴 틈이 있느냐가 기준이다. 한참 피크시간인 점심시간에 텀블러에 얼음을 채우러 앞치마를 벗고 홀에 나갈 수 있다면 그날은 할만한 날이다. 화장실은커녕 목마른데 물 마실 시간이 없다? 미친 듯이 바쁜 것이다. 몇 시인지 고개 들어 시계를 볼 틈이 없다? 미쳐 돌아버리게 바쁜 것이다. 다행이라면 미쳐 돌아버리게 바쁜 날은 일 년에 몇 번 안 된다.


오늘은 주방 과장님과 아르바이트하는 남학생, 나, 이렇게 한 팀이다.

주문이 들어와서 바삐 움직이는 그들을 뒤로하고 다음 설거지가 들어오기 전에 새로 할 일을 찾는다.

쉼 없이 손으로 뭔가를 하고 있는 게 심적으로 편하기 때문에 매번 다음 미션이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김치 손질을 위해 야외 저온창고(워크인이라고 불리는 대형 냉장고)에 간다.

얼마 전 냉장고 위치가 주차장 쪽으로 바뀌면서 자물쇠를 걸어둬서 물건을 꺼내러 갈 때 좀 귀찮다.

저온 냉장고는 컨테이너 모양처럼 생겨서 두 군데로 나뉘어있다.

야채실 쪽 문이 고장 나서 안에서 안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난 지금 김치냉장고 쪽을 들어가는 거니까 크게 긴장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김치 재고량이 많지 않아서 몸을 깊숙이 넣어야 손이 닿는다.

박스 손잡이 부분에 손을 넣고 김치를 꺼내려는데 10kg의 무게 때문인지 손잡이 부분이 찢어진다.

어라, 다시 해봐도 역시나다.

결국 냉장고 안으로 두 발을 넣고 김치 상자를 향해 몸을 숙이는데 순간 철컥!

그리고 캄캄!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전히 김치 상자를 들고 있었고 당연히 문이 밀려서 열릴 줄 알았다.

그런데 문이 꿈쩍도 안 한다.

김치 박스를 내려놓고 손잡이를 잡아 돌리고 밀고 흔들어본다.

역시나 안 열린다. 낭패다.


너무 깜깜해서 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에 눈이 멀 것 같은 느낌이다.

밖은 저렇게 밝은데 냉장고 안은 칠흑 같은 암흑이다.

어둠에 살짝 긴장이 된다.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켜고 싶다.

이곳은 야외 주자창 쪽에 있고 주방과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내가 문을 두드려 봤자 들리지 않는다.

오늘은 손님도 많지 않아서 주차장에 차도 몇 대 없었고 나와 마주친 사람도 없었다.

나는 지금 냉장고 안에 혼자 있고 주방 팀 식구들은 설거지가 잔뜩 쌓이지 않는 한 나의 부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아마 내가 뒤쪽 보조주방에서 뭔가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꼼짝없이 어둠 속에 한동안 갇혀 있어야 한다.


이때 문득 옆 야채칸으로 넘어가서 불 켜는 스위치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선반을 더듬는다. 아침에 야채를 가지러 갔다 봤던 선반 위 늙은 호박 두 덩이가 만져진다.

보이지 않아도 형체만으로 알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작은 위안이 된다. 아마 내 생애 가장 반가운 호박들로 기억될 것 같다. (내가 살아서 나간다면 말이다... ) 호박을 옆으로 밀고 포도 상자도 아래로 내린다. 허리를 푹 수그리고 선반을 타고 넘어간다. 군인들이 하는 낮은 포복 자세가 이런 걸까 상상하며 차라리 어두워서 이런 내 꼴이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라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벽을 더듬는다. 스위치가 없다. 순간 기억을 더듬어보니 스위치는 바깥쪽에 있었던 것 같다.

당황하니 이성적 판단이 안 되는 모양이다. 왜 사람들이 접시물에 빠져도 죽을 수 있다고 하는지 알겠다.

분명 쫄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판단력이 흐려졌다.

엉거주춤 선반을 넘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생각보다 냉장고 안이 춥지 않다.

오늘 기온이 5도로 떨어진다고 해서 겹겹이 옷을 입을 덕도 한 몫한다.

드라마에서 보면 냉동고에 갇힌 주인공이 추위에 까무룩 쓰러질 때 짜잔~ 하고 멋진 남자주인공이 구해주러 오던데. 우리 주방 남자들은 내가 없어진 지도 모른다. 무심한 녀석들.... 이모 여기 있다...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살려달라고 소리도 치지도 않는다.

내가 우울증으로 수년간 여러 가지 죽음에 대한 시나리오를 써봤지만 냉장고 안에 갇혀서 죽는 시나리오는 없었다. 갇혀서 얼어 죽기에는 너무 따뜻(?)하고, 설거지가 밀리기 시작하면 나의 부재를 알아차릴 것이고 누군가는 나를 찾으러 올 것이기 때문에 아주 큰 문제는 아니다. 그때까지 폐쇄공포증이 생긴다거나 예전처럼 과호흡으로 쓰러지는 일만 아니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내가 당황해서 문을 여는 방향을 틀린 게 아닐까 싶어 손잡이를 다시 위아래, 앞 뒤로 움직여본다.

그때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린다.

나는 문을 손바닥으로 두드린다. 탕탕탕!

"이게 무슨 소리야, 사람이 갇힌 건가? " 밖에서 웅성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 쪽팔려....'라는 생각과 동시에 "문 좀 열어주세요~"라고 최대한 차분이 말한다.

마음속으로 살았다 싶으면서도 창피한 마음이 더 크다니 인간의 마음이란 알 수 없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문이 고장 났다는 말로 최대한 빨리 상황을 전달하고 냉장고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주방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설거지 거리는 몇 개 쌓여있지 않았다.

아무도 내가 냉장고에 갇혔다가 살아 나온 걸 모른다. 세상은 나 없이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다니... 좀 억울하다.


나는 조카뻘 되는 과장님과 아들뻘 되는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나의 무용담을 신나서 들려준다.

내가 냉장고에 갇혔지만 신난 포인트는 두 가지다.

첫째, 다행히 내가 갇힌 곳이 냉동고가 아니고 냉장고여서. 과장님은 이 이야기를 듣더니 "오~ 원영적 사고~"하면서 웃는다. (여기서 원영적 사고란, 아이돌 그룹의 원영이라는 친구의 초긍정 마인드를 말한다)

둘째, 나를 구해준 두 분의 등산객에게 평생의 안주거리 무용담을 선물할 수 있어서.

그분들은 '오늘 우리가 냉장고에 갇힌 사람을 구해줬는데 말이지... 우리가 그때 안 지나갔으면 큰 일 날뻔했어...'로 시작하는 인명구출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었고 매번 이 냉장고 앞을 지나가면서 오늘의 영웅적 행동(?)을 복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기억에서 계속 회자된다. 그 사실이 너무 웃기다.


그때 홀의 주임님이 설거지 그릇을 가지고 들어와 내게 말한다.

"오늘 내가 왜 이렇게 의욕이 없는지 모르겠네..."

안 그래도 오늘 기분이 좀 가라앉았는지 평소와 다르게 밝은 하늘색 니트를 입고 오셨더랬다.

주임님은 조금 우울한 날에는 밝은 옷을 입거나 조관우의 "꽃밭에서"를 부르는데 오늘은 아직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주임님~ 깜깜한 냉장고에 10분만 있다 나오면 해결될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려다 그 말을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다.

나한테 효과가 있었다고 다른 사람한테도 그런 건 아닐 테니까.


곧이어 밀려드는 설거지에 결국 김치 손질을 못하고 다시 김치 상자를 들고 문제의 냉장고로 향했다.

어떻게 하면 문이 닫히지 않을까 고민하며 주변에 문에 괴어놓을 만한 것을 찾아 두리번거렸는데 마땅한 게 없었다. 다시 냉장고에 갇히지 않으려면 뭔가 방법이 필요했다. 궁리 끝에 커다란 자물쇠를 문턱에 걸쳐 놓으니 문이 닫히지 않는다. 만약스러워서 돌아 나가려는데 과장님이 헐레벌떡 뛰어온다. 내가 또 갇혔을까 봐 뒤따라 온 모양이다. '괜찮은 청년이로세...' 마음속으로 플러스 1점을 더한다.


과장님과 나는 일하면서 시트콤을 하나 찍듯이 농담을 주고받고 노는데 제목은 "예비사위와 장모님"이다. 매일 반복되는 고된 일상 속에서 우리만의 재미있는 유머를 주고받는 것이다. 딸과 결혼할 예비사위와 장모인 내가 같은 주방에서 일하면서 벌어지는 상황으로 과장님이 나를 위해 뭔가 배려를 하면 플러스 1점을 주는 동시에 "합격~"이라고 칭찬해 준다. 그러면 과장님은 "이제 장모님이라고 불러도 되는 거예요?" 이러고 웃는다. 반대로 나한테 과도한 미션을 주면 "사위~ 너무한 거 아니야? 불합격~"을 외치고 그러면 과장님은 질세라 "휴~ 이제 벗어나는 건가? 다행이다"하며 깔깔 웃는다. 타지에서 올라와서 부족한 인력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과장님을 하루 한 번이라도 웃겨주는 것이 나의 미션인데 오늘은 예기치 않게 냉장고에 갇힌 덕분에 큰 웃음을 줬다.


냉장고 사건으로 오늘 오후 신나게 웃었고 나는 다시 삶의 에너지를 채웠다.

냉장고 밖은 환한 동시에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따뜻했다.

'역시 살아있다는 건 참 좋아...' 나는 며칠간의 우울함을 떨쳤고 약간의 창피함과 에피소드를 얻었다.

덕분에 7개월 만에 이렇게 허튼 글도 다시 쓰게 되니 냉장고에 갇혔던 것이 아주 나쁜 일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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