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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같은 사전, ‘사전’ 같은 친구

by 윤서린

어려서 국어사전은 몇 없는 나의 친구였다.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어린이 신문 구독을 했는데 나는 틀린그림 찾기와 십자낱말풀이를 꽤 좋아했다.

낱말의 뜻을 보고 가로와 세로에 들어갈 단어를 유추하고 맞추는 게 누구보다 신났다.


집에 마땅히 읽을 책이 없던 나는 심심할 때면 국어사전을 책처럼 읽었다. 얇은 종이에 이렇게나 많은 단어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적혀있는 게 참 예쁘게 느껴졌다. 가끔 그림도 있어서 보는 재미는 더했다.


사전은 종이가 얇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었다. 찢어지거나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넘겨야 하는데 귀한 보물 같은 존재. 나는 내 친구가 이렇게 섬세한 존재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아껴주고 싶었다.


사전을 읽다가 좋아하는 단어에는 조심스럽게 밑줄도 그었는데 종이질이 얇아서 늘 뒷면에 형광펜이 비치는 게 신경 쓰였다. 하지만 색연필로 밑줄을 그으면 칠하는 맛이 덜했다. 내가 찾은 단어들은 형광펜의 연둣빛이나 초록색, 핑크색, 노란색 일 때 비로소 보물처럼 빛나서 내 마음에 박혔다.


지금도 사전에 밑줄을 그을 때면 나는 조심스럽다. 사전은 내 오랜 친구다. 좋아한다고 해서 내 흔적을 너무 많이 남기는 건 실례다. 그래서 이미 알고 있는 단어나 의미가 유추되는 단어는 밑줄을 잘 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거나 새롭게 알게 됐는데 기억하고 싶은 단어 위주로 밑줄을 긋는다.


가끔은 내 친구에게서 어둡거나 부정적인 단어를 보게 된다.그럴 때면 나는 쨍한 형광펜 대신 갈색이나 회색 같은 색으로 그 단어에 마법을 건다. 어두운 단어가 뿜어내고 있는 기운이 세상밖으로 나오려 할 때 그 빛이 흐려져 힘을 쓰지 못했으면 바람으로.


욕심 같아서는 그런 단어들이 내 친구 안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 친구는 ‘사전’이라는 자신의 존재 의미가 달라지게 되겠지. 친하고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지길 바라는 건 옳지 않으니까. 서로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우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전 안에 있는 긍정적이고 우습고 밝고 아름다움이 가득한 단어들과 부정적이고 버겁고 어두운 힘겨운 단어들이 뒤섞여 존재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이런 게 바로 ‘나’와 ‘우리’ 그리고 ’ 세상‘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진다.


세상이 아름다운 단어로만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만약 내 삶에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인 단어가 찾아온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책장에 꽂혀있는 내 친구를 펼쳐 도움을 청하고 싶다. 갈색과 회색 펜의 마법의 힘을 빌려와 나를 힘들게 하는 그 단어의 힘을 빛 바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단어의 앞 뒷장을 넘겨 그동안 내가 찾아낸 빛나는 단어를 천천히 읽어보고 싶다.


어두운 단어 사이사이에도 조용히 빛나고 있는 아름다운 단어들이 있다는 것, 내 삶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수많은 단어들이 남아 있다는 것, 그것에 작은 안도감와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전을 덮으며 작은 소망을 마음에 품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한 권의 사전 같은 친구가 되어서 서로의 삶의 빛나는 순간과 어두운 순간을 함께 색칠해 나갈 수 있기를.

그리고 이왕이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찾게 되는 많은 단어들 중에 밝은 색 형광펜이 덧대지는 순간이 더 자주 찾아오기를. 응원하고, 소원하며,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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