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빨강 머리 앤》을 다시 읽다

마릴라의 재발견

by 티라노

유년시절에 《빨강 머리 앤》을 읽었다.

그때는 앤의 입장에서 읽었다.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힘들 때,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 같을 때,

사람들이 나를 못마땅해한다고 느낄 때,

다들 갖고 있는 걸 나만 갖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


그런 순간들마다 나에게 들었던 기분을 떠올리며,

앤과 수다를 떠는 기분으로,

앤의 마음에 공감하면서 읽었다.


섬세한 어린아이의 마음이었다.

8108db21880eb938761158e4d944f750.jpg 이미지 출처: https://www.instiz.net/pt/4814339





서른을 훌쩍 넘은 나이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빨강 머리 앤》을 다시 읽었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마릴라와 고민을 나누는 기분으로,

마릴라의 마음에 공감하면서 읽었다.


너무 사랑스러운 이 아이가 다른 사람의 눈에 버릇없는 아이로 보이면 어쩌나 고민하면서,

응석을 받아주다가 절제와 인내를 모르는 사람으로 자라나면 어떡하지, 하는 내적 갈등을 겪으며,

자식보다도 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아이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망설이면서,

내가 이 아이에게 보여주는 행동 하나가, 건네는 말 한마디가 이 아이를 망치면 어떡하나 고민하면서,

살고 있는 내 마음과 마릴라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겹쳐져서

양육자의 마음으로, 마릴라의 시선으로 읽었다.

mother-1039765_1280.jpg 엄마가 되는 건, 내 안의 나 아닌 나를 만나는 새로운 경험이다.




"고길동이 불쌍하게 느껴지면 어른"이란다.


다운로드.jpg 이미지 출처: https://1boon.kakao.com/slidee/ff_kkd


둘리를 맨날 쥐어박고,

말썽 부릴 때마다 혼내고,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하는

고길동은 어렸던 내 눈에는 악당이었다.


어른이 되어서 보는 고길동은,

정 많은 성인(聖人)이다.

연고도 없고, 배경도 모르는 공룡을, 타조를, 외계인을,

계속 품고, 먹여주고 재워준다.


그는 머리카락을 다 청소기로 밀어버리고,

집을 두 번이나 날려먹고 침수시켜도,

말썽꾸러기들을 내치지 않는다.

(중년 남성에게 머리카락을 빼앗는 건 사탄도 삼가는 잔인한 일이라는데.)

둘리의 만행 리스트는 하단 링크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kdldps90&logNo=221120852622&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마릴라도 꼭 그렇다.

언뜻 보면 잔소리 많고, 엄하고, 무서운 어른이다.

좀 조용히 해라, 그만 좀 말해라, 하고,

'목사님 설교 재미없어요.' '공부하기 싫어요' 하면,

그래도 해야지,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라고 입바른 소리를 한다.



0298ae6db70437f8b02708b69737aa55.jpg 방을 깨끗이 써야 한다며 잔소리하는 마릴라, https://www.instiz.net/pt/4814339


하지만 그게 앤이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앤을 어떻게든 바꿔놓으려는 고집에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법이 서툴러서,

솟아나는 사랑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어서,

자신의 사랑 때문에 앤이 잘 못될까 봐 걱정해서였다는 걸,

어린 앤은 몰랐지만, 나는 너무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훌쩍 커버린 앤은, 어쩌면 그 마음을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자식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

양육자로서의 자신이 낯설고 서툴러 불안한 부모의 마음,

마릴라의 대사에서, 대사의 행간에서 묻어 나오는

진정성 있고 구체적인 고민들에 공감하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마차씬.png 이미지 출처: https://www.ksryu.com/180
앤은 바닷가 길을 보며 황홀감에 빠져 조용해졌다. 마릴라도 더는 묻지 않고 밤색 말을 건성으로 몰며 깊은 생에 잠겼다. 아이가 가엾다는 생각이 불쑥 마릴라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사랑받지 못한 채 얼마나 굶주린 삶을 살았을까. 고되고 가난하며 무시받는 삶이었을 것이다. 눈치 빠른 마릴라는 앤의 이야기에서 행간을 읽고 진실을 파악했다. 진짜 집이 생겼다며 그토록 기뻐한 것도 이해가 갔다. 고아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앤에게는 딱한 일이었다. 매슈의 설명하기 힘든 변덕을 받아들여 아이를 키우면 어떨까? 매슈는 이미 마음을 정했고, 아이는 착해 보이는 데다 가르치는 맛도 있을 듯했다.


착오로 초록 지붕 집에 온 앤을 돌려보내러 가는 길. 앤을 딱하게 여기는 마음에 초록 지붕 집에서 길러볼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는 마릴라. (여기서부터 마릴라가 차갑고 딱딱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어야 하는데 어렸을 때는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안돼요, 돌려보내면 안 돼요,라고 마음속으로 외쳤을 뿐!)



블루엣부인.png 블루엣 부인, 앤과 조합이 좋아 보이진 않네요. 출처: https://www.ksryu.com/181
블루엣 부인이 앤에게 눈길을 휙 던져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며 캐물었다.
"나이는 몇 살이고 이름은 뭐지?"
"앤 셜리예요. 열한 살이고요."
앤은 철자에 주의해 달라는 당부도 잊은 채 겁먹어 움츠러든 목소리로 머뭇머뭇 대답했다. [..]

마릴라는 앤을 보았다. 창백해져서 입도 뻥끗 못하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앤은 도망쳐 나온 덫에 또다시 걸려던 무기력한 어린 짐승처럼 서글퍼 보였다. 그냥 모른 체했다가는 그 간절한 표정이 죽는 날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마릴라는 블루엣 부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수성 넘치고 '들뜨기 잘하는' 이 아이를 저런 여자에게 보낸다고! 아니, 그런 짓은 할 수 없었다!


마릴라의 따뜻한 마음이 드러난 순간. 동정심 있고, 세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벌써 앤이 감수성 넘치고 들뜨기 잘하는 성격이라는 것, 그리고 블루엣 부인 아래서 사는 건 앤에게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들 것이라는 걸, 이미 깨달아버렸다.


pimg_78464419374304.jpg "무뚝뚝하게 쌓이는 정" /링크/http://my.aladin.co.kr/common/popup/printPopup/print_Paper.aspx?Pap
마릴라는 앤을 엄하게 꾸짖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앤의 말 중 몇 가지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특히 벨 장로의 기도와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는 마릴라도 수년간 속으로만 생각했지 입 밖에 내어본 적이 없었다. 마음속에만 몰래 갖고 있던 비판적인 생각들이 이 솔직하고 소외당했던 아이의 입을 통해 비난의 모양새로 튀어나온 기분이었다.


겉으로는 앤을 나무랐지만, '앤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하고 경청해 주는 마릴라. 그리고 어떻게 대꾸해 주는 게 앤에게 가장 좋은 교육일지 고민하는 마릴라. 요즘 저도 맨날 이럽니다. 어린 영혼을 맡아 기른다는 건 정말 고민의 연속인 것 같아요.


"앤 셜리, 제정신이냐? 당장 와서 뭐라도 걸치고 가야지. 바람을 붙들고 얘기하는 게 낫지. 모자도 쓰지 않고 외투도 없이 갔네. 머리카락 휘날리며 과수원을 쏜살같이 빠져나가는 것 좀 봐. 감기라도 호되게 걸리지 않으면 다행이지. "


아, 정말 앤을 걱정하는 마음이 흠뻑 묻어나는 말. 츤데레 마릴라다. 말의 형식은 구박, 나무람이다. 하지만 속마음은 사랑이다. 감기 걸리지 않았으면 하는 애정 어린 염려와, 기뻐서 달려 나가는 앤의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지는 그런 마음. (요즘 내가 자주 경험하는 마음의 상태다. 세 살 난 아들이 잠바도 안 입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 '어허, 감기 걸려, 절대 안 돼.' 하고 엄하게 말하지만 속마음은 정말, 하나도 엄하지 않다. 언제 이렇게 컸지, 밖이 그렇게나 좋을까, 하는 마냥 좋은 마음이다.)



"아주머니도 빼빼 마르고 못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보세요."

앤이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하듯 말했다.

문득 오래된 기억 하나가 마릴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주 어렸을 때 친척 아주머니 한 분이 마릴라를 보고 어떤 사람에게 "어쩜 저렇게 까맣고 못생겼는지 가엾기도 하지"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날 입은 마음의 상처가 아물기까지 꼬박 50년이 걸렸다.


경청하고 공감해 주는 마릴라.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는 시도, 자신의 마음과 연결해 보려는 시도를 계속하는 것. 그게 좋은 부모의 조건이지 않을까 싶다.


(지붕에서 떨어진 앤이, 베리 씨에게 안겨서 집으로 오는 장면에서) 그 순간 마릴라는 불현듯 깨달았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두려움 속에서 앤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앤을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 앤을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탈길을 정신없이 뛰어 내려가면서 마릴라는 앤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놀이터에서, 마트에서 놀던 아들이 잠깐 눈에서 사라지면 갑자기 내장을 쥐어뜯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낄 때가 있다. (정신적 상처는 실제로 신체적 통증을 유발한다는데, 정말이구나 싶었다.) 일전 단지 내 놀이터에서 놀던 아들이 인접한 테니스장 쪽으로 뛰어가서 잠시 보이지 않았을 때가 있었는데 정말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아들을 찾았더랬다. 아들은 갑자기 울부짖으며 나타난 엄마가 자신의 등을 철썩 때리며 "걱정했잖아! 그렇게 멀리 가면 어떡해!!"하고 소리를 지르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엄마 마음은 다르단 말이야, 이 놈아. 앤이 많이 다쳐서 실려오는 것을 바라보는 마릴라의 마음, 십분 이해가 간다.


마릴라는 다정한 눈길로 앤을 바라봤다. 불빛이 어둠 속에서 그림자로 은은하게 녹아들지 않았다면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살아하는 마음은 말로 행동으로 알 수 있게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릴라는 몰랐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는 만큼 더 크고 깊게 빼빼 마른 잿빛 눈의 여자아이를 사랑하고 있었다. 앤에 대한 사랑이 지나친 게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들 정도였다. 앤에게, 아니 인간에게 이렇듯 끔찍이 마음을 쏟는 것은 죄악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사랑하는 마음이 덜했다면 그렇게까지 엄하고 냉정하게 교육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교육 방식으로 자신도 모르게 속죄하고 있는 사실을 마릴라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옛날엔 눈으로 보고도 마음에 와 닿지 않았던 구절. 마릴라 아주머니의 마음이 직접적으로 묘사된 부분이다. 사랑하는 만큼 더 엄하고 냉정하게 교육하려고 했다는, 마릴라의 자기 고백.


그 사이 앤은 키도 훌쩍 자랐다. 마릴라는 어느 날 앤과 나란히 섰다가 앤의 키가 더 크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앤, 언제 이렇게 컸니!"

마릴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말끝에 한숨이 따라 나왔다. 마릴라는 알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다. 마릴라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어린아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진지한 눈빛을 한 키 큰 열다섯 살 소녀가 사려 깊은 조그마한 얼굴을 당당히 들고 서 있었다. 어린아이를 사랑한 만큼 눈앞의 소녀도 사랑했지만, 마릴라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상실감이 밀려왔다.


눈물을 정말 펑펑 쏟으며 봤던 장면. 세 살인 아들을 보며, 두 살의 모습이 이제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순간을 알기에… 이제 기기 시작하는 둘째 아들을 보며, 낳자마자 보았던 붉고 자그마하던 신생아의 모습이 없어진 것이 대견하면서도 아쉬울 때가 있음을 알기에… 이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면 내 마음도 이렇겠구나 싶어서 눈물이 났다. 아이들이 자라는 게 참 아깝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의 대가는 참 혹독하다. 아무 일이 없어도 (그들의 옛날 모습과의) 잔인한 이별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에겐 서로가 있잖니, 앤. 네가 없었으면…, 네가 이 집에 오지 않았다면 내가 어땠을지 모르겠구나. 아, 앤, 내가 그동안 너한테 조금 엄하고 모질게 굴었다는 거 안다만… 내가 매슈 오라버니만큼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말할 수 있을 때 말해주고 싶구나. 마음속 말을 한다는 게 내게는 참 어려운 일인데, 오늘 같은 날은 한결 수월하구나. 난 널 친자식처럼 사랑한단다. 네가 초록지붕 집에 온 뒤로 너는 내 기쁨이고 위안이었지.




말할 수 있을 때, 많이 말해줘야겠다.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로, 이 아이들이 내 삶의 최고의 행복이고 위안이었다고. 늘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도, 잊으면 안 된다고. 주양육자가 되어 읽는 《빨강 머리 앤》에서

마릴라를 다시 발견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오롯이 내 마음과 꼭 같은 마릴라의 마음을 대사에서, 행간에서 발견하면서 앤의 성장을 응원하듯 마릴라의 성장을 응원하고, 앤과 공감하며 고민을 나누듯 마릴라의 고민을 나누고 함께 한다. 눈물 나면서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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