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똘히 뭔가에 빠져 생각하다가 불현듯 지난 시간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이불을 차고 싶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끄러운 순간,
아련한 기분에 빠져 멍하니 바깥을 바라봐야 하는 순간,
어떤 문장에 꽂혀 골몰하게 되는 순간.
이 모든 순간이 흔적이 되어 마음속에 남습니다.
해마다 맞는 봄도 흔적을 남깁니다.
그 흔적은 낯설면서도 익숙합니다.
매번 찾아오는 봄이 반가우면서도 심드렁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올해 보지 못한 꽃은 다음에 보면 되지, 하고 꽃 구경을 미루는 바보 같은 짓도 서슴지 않고 하죠.
익숙함에 빠져 낯선 것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눈과 마음을 가립니다.
단 한 번의 개화를 위해 겨울을 지낸 치열한 생의 투쟁을 몰라보고 말이죠.
투쟁으로 얻은 생은 쉽게 스러지지 않는가 봅니다.
꽃잎은 땅에 떨어져도 소멸의 수순을 곧바로 밟지 않습니다.
봄은, 봄꽃은 땅 위에 그리고 남긴 채 생의 흔적을 남깁니다.
철쭉은 흙을 캔버스 삼아 점점이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아직 봄의 흔적을 남겨 흘러가는 시간을 잠시라도 부여잡으라고.
가다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요.
책 읽기도 여러 흔적을 남기는 것이지 않을까요.
어떤 흔적은 금세 지워지기도 하지만,
또 다른 흔적은 지나간 미련을 부여잡듯이 되새기고 떠올리며 화석처럼 남기곤 하죠.
오늘 읽고 있는 책은 한 폭의 그림이 되어 흔적으로 남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