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 달빛을 채우는 건 내 마음이겠죠

by 글담

거대하고 환한 빛을 뿌리는 보름달도 이울겠죠.

이운 달빛에 스산한 바람까지 불면 새삼 가을임을 깨닫겠죠.

오늘이 그런 날입니다.

바람이 시원하다고 느껴야 할 텐데,

바람은 휑한 마음을 휘젓고 야윈 나뭇가지 하나 남겨두고 떠납니다.


길에 떨어진 가을은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차마 가을을 밟지 못해 멈춰선 한 남자의 등은 꽃잎 떨구며 서 있는 앙상한 나무 그림자입니다.

‘어째서’

그의 머릿속엔 무수한 단어가 흩날렸지만,

또렷하게 떠오른 것은 그저 ‘어째서’뿐입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나에게만 일어난 듯할 때,

우주 속 먼지의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그럴수록 광활한 우주 어디에선가 나에게 손을 뻗을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적막한 우주에서 고요의 순간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순간의 평온함에 나를 맡길 수 있겠죠.

그 평온함이 무기력한 고립감으로 이어지기 전까지는.


한 순간 웃다가 한 순간 울다가 침잠에 빠지는,

그러다가 다시 한껏 기운을 차려 산책길에 나섭니다.

어라, 찬바람이 불어도 곳곳에 장미는 살아있다고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곳곳에 향기로운 내음이 공원을 휘젓습니다.

한밤중 향기에 취할 듯 말듯 걸음도 종종거립니다.

그때 웬 남자가 저만치 앞서 갑니다.

느긋하게 걷는 그를 제치려는데,

오호라, 공원을 채우던 향기는 그의 향기였습니다.

향수 내음이 그의 뒤를 좇으며 공원 곳곳에 뿌려졌던 것이었네요.

그래도 달빛에 취한 저 장미의 내음이라고 되뇝니다.


어느새 고립된 나는 장미와 연결되어 평온함을 되찾았습니다.

밀린 원고 때문에 지끈거리는 머리도 한결 가벼워졌고요.

향기에 취하고,

찬바람에 스산해하고,

달빛에 황홀하고,

궂긴 소식에 먹먹한던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오늘밤은 잠을 잘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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