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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공감이 될 때, 상대를 긍정합니다

by 글담

오랜만에 독특한 카페를 찾았습니다.

혼자 조용히 책을 보라고 만든 카페입니다.

아예 느긋이 앉아 책을 보라는 거죠.

혼자만의 공간을 바라보며 욕심을 부립니다.

이곳이라면 글감이 더 나올까 하고요.

아, 그 생각은 금세 사라집니다.

글 작업 때문에 머릿속이 새하얗거든요.


온 종일 잤습니다.

먹고 잠시 앉았다가 다시 누워 잤습니다.

방전이라고 해도 될 만큼 지친 몸과 마음입니다.

주말 중 하루라도 머리를 비우고 싶었습니다.

세상의 끈은 그렇게 놔두지 않았지만요.

자꾸만 일어나라고 흔듭니다.


“나 잘래.”

대놓고 말합니다.

상대방은 급하지 않다고 하지만,

내가 급합니다.

그런데도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자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급한 게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을까요.


결국 새벽에 일어나 부탁한 것을 처리합니다.

유기 동물의 생명이 마구잡이로 짓밟히는 와중에 잠이라니요.

항의를 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소통을 호소합니다.

이 사회는 곳곳이 ‘슬픔’으로 가득합니다.


생명을 구하는 일에 한계를 느낍니다.

그 한계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나오는 구절과 같습니다.

내 슬픔이 아닌 것에 대한 나의 한계입니다.

그럼에도 저자가 말한 것처럼 그 한계를 인정하지만,

긍정하지 못하겠습니다.

‘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야 합니다.


절망보다 더한 절멸의 순간을 대책없이 기다려야 하는 생명.

숫자와 행정으로 생명의 가치를 무시하는 또 다른 생명들.

생명과 생명의 마주함에 이러한 극단의 모순이 있습니다.

이게 어디 유기 동물뿐일까요.

지구 곳곳에 인간과 인간이 이런 모순에 처해 있습니다.


평화와 생명에 대한 존중은 슬픔의 공감입니다.

슬픔의 공감이 될 때,

비로소 상대의 존재 가치를 긍정하게 됩니다.

그제야 세상은 함께 공존하고 상생합니다.

이걸 공유하는 게 그리도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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