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그쳤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몰라 우산을 들고 다닙니다.
터벅터벅 카페로 향하면서 하늘을 봅니다.
비록 파란 하늘은 아니지만,
광대한 구름을 보면서 한 점 불과한 존재를 새삼 깨닫습니다.
“장마라서 손님이 없고,
장마가 끝나면 휴가라서 손님이 없을 테고.”
카페 주인장의 넋두리가 공간을 채웁니다.
조용한 적요의 공간에 피아노 음악만이 남아 있습니다.
혼자 있는 카페는 아늑하지만,
혼자 있어 카페는 위태롭습니다.
한동안 일하다가 슬슬 지루해서 고개를 들었다가 주인장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주인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냅니다.
그도 심심했나 봅니다.
잠시 기지개를 켜다가 금세 수다 꽃을 피웁니다.
이러면 또 시간을 한참 빼앗길 텐데 말이죠.
한 작가는 “만남에는 위험이 따른다”라고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서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만족을 얻는 대가로 우리는 피할 수 없이 줄기차게 이어지는 고통”
이 고통을 참아야 한다는데,
진정한 만족과 줄기차게 이어지는 고통이란 무엇일까요?
고통은 이래저래 마주하면서 겪게 되는 소소한 상처,
혹은 커다란 갈등까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만족을 얻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골똘히 생각합니다.
그 작가는 함께 진리를 구하는 관계라고 말하는 듯한데,
이 또한 쉽지 않은 해석입니다.
카페 주인장과 알고 지낸 지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꽤 오랫동안 단골로 지내왔으니 만났을 때 고개만 끄덕이는 사이는 아니죠.
함께 진리를 구하는 관계라고 말하기에는 참 애매하고요.
진리라는 게 거창한 메타포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서 질문을 주고받으니,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은 듯하고요.
만남은 참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어떻게 살 것인지를 기준으로 볼 때,
만남이란 관계를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하고요.
카페에 덩그러니 놓인 자전거와 의자처럼 각자의 실존으로 만나야 할 텐데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어울림이 만들어지는 관계.
아,
생각해 보니 이 또한 무지하게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