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곳에만 몸을 사려라.
연말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되는 일이 없다, 고 중얼거렸더니 정말 모든 일이 안 됐다. 올해 내내 그랬다. 어느 순간 내가 그 말을 하고 다녀서 모든 일이 잘 되지 않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던 와중 깔짝깔짝 나를 건드리던 인후통이 조금 거슬릴 정도로 아파서, 이비인후과에 방문했다.
대기인원 13명,
대부분이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아서인지 이비인후과는 아이들 소리로 북적거렸다. 틀어 놓은 티브이에서는 누가 들어도 ‘연말’ 임을 알 수 있는 말들이나 광고들이 나오고 있었다. 이따금 기다리는 시간을 괴로워하는 아이의 보채는 울음소리가 들렸고, 때로는 아이를 달래는 부모의 간곡한 외침이 들렸으며, 가끔은 접수 카운터까지 왔다가 접수된 대기 인원수를 보고 ‘접수 취소해 주세요,‘ 이야기하는 환자분까지. 많은 사람들의 족적과 소리들이 오고 가는 공간들이었다.
때로는 기침소리, 가끔은 더운 침묵. 나는 외투를 잘 개어 여러 번 매만지면서 결국 소매를 걷고도 숨이 답답해 잠시 가슴께를 눌렀다.
‘편도가 많이 부었네요, 소염제 주사를 하나 맞으시죠 약은 5일 치 처방이 나갈 겁니다.‘
하루에도 이 말을 수십 번이나 되풀이할 의사 선생님에게 나는 ‘힘드시겠어요, 환절기라 환자분들이 많으시죠,’ 하고 계절인사를 하듯 너스레를 떨었다.
의사 선생님은 대답 대신 쓱 웃어 보이셨다.
‘따끔하세요.’
따끔하지 않은데, 어디가 따끔하시다, 는 걸까. 주사를 맞은 알코올솜을 잠시 문지르면서 나는 다 쉰 목소리로 허허 웃었다.
약국에서 처방전을 내밀었다. 나올 약은 소염제, 위장계 알약, 아마 항생제. 소화계 계통이 좋지 않아 이비인후과를 밥 먹듯 다녔던 나에게는 어쩌면 너무도 익숙한 약 이름들. 정제를 보지 않고도 약 이름만으로 그 약의 형태나 성질을 맞출 수 있다. 조금 쓸쓸하네 싶었다. 부은 목 때문인지 미열이 조금 올랐다. 약을 받고 나니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맘때즈음은 오후 다섯 시쯤 되면 슬슬 캄캄해진다. 캄캄해지면 금세 집에 돌아가야만 할 것 같다. 그런 기분이다.
나았다가 괜찮아지고, 나았다가 괜찮아지는 인후인지, 편도인지 모를 염증을 모른척한 벌이야 뭐, 약을 며칠 먹으면 그만이지. 싶었던 내 생각은 오판이었는지, 감기는 지독히도 오래갔다. 5일 치 약을 먹고서도 기세등등하게 편도가 다시 부어올랐다. 모든 활동을 다 뒤로 미뤄버리고 움직임을 최대한 줄이고 이틀 정도를 침대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 꼼짝 않고 누워서 끓인 보리차만 마셔대면서 일을 쉬면서 ‘처음 하는 ‘ 휴식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3월 , 퇴사 이후. 집에서도 나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모르는 탓, 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던가. 규정했던가. 몰아갔던가.
누워있으면서도 자꾸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살아있어야 하는 것을 자꾸 증명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온몸이 간질간질했다.
목구멍이 간질간질해서 잔기침을 허파가 들떠 퍼질 정도로 해대면서도 ‘이게 괜찮은 걸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그제사 나는 깨달은 모양이다.
누군가에게는 그대로도 괜찮다고 말하면서
스스로에게는 그대로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사실을.
나, 에게 관대하기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보기 좋게 퍼져 있는 고양이 시안이를 보며 들리지 않을 정도의 쉰 목소리로 나는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필요한 곳에만 몸을 사리라는 듯, 그동안 내 몸이 내게 경고 사인을 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누운 동안 새삼 많아지는 생각 속에서 헤엄치다가
나는 나를 잘 돌봐야지, 그래야만 해.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죽을 데웠다.
아침, 점심, 저녁약을 먹으려면, 세끼를 먹어야 했고, 그러려면 스스로를 잘 챙겨 먹여야 했기에 어쩌다 보니 나는 스스로를 잘 챙겨 먹이게 되었고,
그동안의 식습관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도 깨닫게 됐다. 뭐가 어떻든 매일은 흘러가겠지만, 누군가의 어깨를 두드려줄 힘이라도 챙기려면 나부터 괜찮아야겠다고. 함수그래프처럼 쭈욱 이어지는, 아마.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감기기운을 보며 나는 조금은, 소심하게, 그리고 조금은 야무지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