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가기 위해 병원에 간 날.

지금 네게 필요한 건 우산과 진료의뢰서.

by Sunyeon 선연

오랜만에 오전 7시 알람을 맞추었다. 한 달 정도 기다린 병원 진료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부러 일찍 진료를 예약했던 건 하루를 일찍 시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지만, 사실 북적거리지 않는 여유를 즐기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 잔뜩 흐린 하늘. 비가 예보되어 있었기에 우산을 꺼내 뒀었는데 그것을 챙기지 못한 것을 안 것은, 한시간을 내리 가야 하는 버스를 타, 단말기에 승차태그를 '삑' 하고 난 후였다.


좌석에 앉았을 때 왼쪽이 허전하다는 감각이 들이치자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고 이내 '아 우산을 챙기지 않았구나 비가 쏟아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밀려들었다. 다행히 그때엔 하늘이 살짝 찌푸린 채로 있었으므로 생각은 잠시 뒤쪽으로 미뤄두기로 하고 눈을 감았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생각대로 여유로웠다. 성인이 된 이후, 상급병원 진료가 처음이었던 나는 정류장에서 내려 멀리서부터 보이는 병원의 외관에 압도되고 말았다. 혼자서 "와, 정말 크다!" 혼잣말을 하며 오르막길을 올랐다. 건물은 정말 크고 웅장했다. 병원 로비에는 수많은 족적들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누군가의 무게들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 병원은 이런 공간이었지' 새삼스레 유년기 병원 입원실의 기억이 떠올랐다. 유난히 잔병치레가 많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병원에 머물 일도 많았다. 말괄량이 었던 철없던 내가 어렸었던 내가, 누군가의 공기를 읽기는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25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병원 내의 카페가 만석이었기 때문에 나는 곧바로 이비인후과로 향했다. 키오스크로 도착 체크인을 하고 초진이었기에 본인확인을 위해 접수 번호표를 뽑았다. 이윽고 창구 앞에 섰을 때였다.

"진료 의뢰서 주세요."

매일 그 말을 수백 번도 더 반복하는 사람의 톤, 의 목소리로 선생님의 '그 말'을 내게 하셨을 때 나는 순간 패닉에 빠졌다. '진료 의뢰서...? 진료기록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걸까?' 무언가를 되묻는 것이 조금 부끄러운 공기였지만 되묻지 않으면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므로 우선 나는 침착하게 물었다.

"아... 신분증 이외에 다른 서류가 더 필요하다는 말씀이신가요?"


핑이 들어와 퐁을 돌렸더니 다시 핑이 돌아왔는데, 그건 살짝 찌푸린 미간과 함께 돌아왔다. 접수처 선생님은 이런 상황에 매우 익숙해 보였고 꽤나 지쳐 보이셨기 때문에 나는 진심으로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짧은 침묵 이후에 이윽고 프린트물 한 장이 내 눈앞에 놓였는데 잠시의 침묵이 미안하셨는지, 그게 아니면 내 표정을 읽기라도 하셨는지 선생님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강의를 하듯 차분히 설명하시길 "이곳은 상급병원이어서 진료 의뢰서가 있어야 보험적용을 받으실 수 있어요"가 내용의 전부였다. 즉. 큰 병원에 진료를 '의뢰' 한다는 내용을 증명하는 1 혹은 2차 병원의 의뢰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안내서를 받아 들고 가장 가까운 이비인후과를 검색하면서 나는 우선 결제를 부탁드린다 요청드렸고, 진료 이후 바로 약 처방전이 나왔기 때문에 결국 근처 병원에서 의뢰서를 받아 다시 병원까지 와서 결제를 다시 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기도, 진료도 허무할 정도로 오래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1차 일정을 빠르게 끝내고 이비인후과 다녀오기 대장정에 나섰다.


병원 정문에서 멈칫, 하고 밖을 보니 비가 어마어마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아뿔싸,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우산이었다. 집에서 미처 챙겨 나오지 못한 우산이 생각났다. 또 그 우산에 찍힌 편의점 로고가 선명하게 떠올라 잠시 숙연해졌다. 그래도 병원 입구에 편의점이 있었던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9000원짜리 비닐우산을 고 아직 문도 열지 않은 황망한 점포들 사이를 슬로 조깅하듯 걸으며 (아, 슬로 조깅은 건강에 좋기라도 하지...) 병원을 가기 위해 병원을 가다니 기가 막히네, 헛웃음이 났다.

수업료라 치기에는 꽤나 비쌌지만 미리 알아보지 않은 내 잘못이 크니까... 하고 생각해도 억울한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경험하지 못한, 혹은 않은 모든 것들은 이렇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 같은 것들인가 보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이 세상에 아직 얼마나 많을까. 듣지 못한 노래 보지 못한 영화 맛보지 못한 음식들처럼. 겸손해야겠다는 생각이 하릴없이 들었다. 아무리 당연한 일도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 되고 모르는 일이면 겪기 전까지는 무지에 가까운 일인 것이다. 다 알았다고 착각하는 순간 표정을 바꾸는 것들도 도처에 있지. 사람 관계 같은 것들이 그렇지, 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아닌 이상 그 사람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오전부터 만보계 6000보를 찍고, 결국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집에 돌아가는 버스를 타려고 한참을 걸어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슬슬 우산을 접어도 된다는 듯, 날이 개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있었던 모든 일들이 한 편의 시트콤 같았다. 상급병원 진료 예약을 잡은 덕에 진료의뢰서의 존재도, 의미도 알게 되고 쓰임새도 알게 되었으니 그것 나름대로 되었겠지.라고 나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만히 왼쪽을 보니, 우산에 아직 묻은 물방울들이 오늘 아침의 '날씨'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렇게 경험 하나와 편의점 우산 하나가, 또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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