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러 쓰는 감각에 대하여.

손 끝에 힘을 가만히 흘려넣는 시간.

by Sunyeon 선연

"필사 그거 재밌어?"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꾸준히 무언가를 적는 것을 좋아하는 나를 신기하게 여기는 누군가가 흔히 하는 질문이다.

"재미라고 해야 할까, 글쎄."

무언가 말을 보태려다 나는 그냥 쓱 웃고 만다. 재미도 의미도 그 누군가에겐 그리 대단치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 가격이 제법 비싸게 느껴지는 요즈음. 스테디 셀러 혹은 베스트 셀러 옆 코너에는 당연하게 필사 도서들이 모여 있다. 필사 자체가 하나의 시류임을 증명하듯. 앞다투어 필사 관련 도서가 쏟아져나오는 이유에 대해서 굳이 설명을 얹을 필요는 없을 테지만 모르긴 몰라도 필사가 작은 성취감을 얻는 데에 꽤나 좋은 수단임은 분명해 보인다. 고전 문학의 한 구절. 계몽의 한 구절, 혹은 자기 계발서, 카피의 한 구절을 적으며 모두가 하루의 언저리를 지날 것이다.


나는 '필사'를 좋아한다기보다는 정확히는 '눌러 쓰는 행위'를 좋아한다. 전자의 것은 취미 활동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이라면 후자의 것은 밀도와 무게감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종이,펜,필압. 세 요소들이 율동감을 가지며 어우러지는 순간. 그 순간들을 사랑한다. 가령 어떤 문장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문장을 쓰기 전에 쓰고 싶은 재질의 종이 노트를 먼저 고른다. 적당한 그람수의 노트를 고르고 나면 필기구를 고른다. 미끄러지는 감각을 상상하면서. 연필은 흑연의 뾰족한 정도와 심의 진하기에 따라서 표정을 달리하고, 볼펜은 볼의 크기에 따라 필체가 조금씩 달라진다. 만년필은 ef,f,mf등. 촉의 굵기에 따라 글줄이 다른 감상으로 적힌다. 딥펜은 처음 찍어 쓸 때에 잉크의 농도가 가장 진하며 덧대어 쓸수록 농도가 중첩되므로 독특한 느낌이 살아난다. 필기구를 고르고 나면 자리에 앉아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 두고 문장을 쓴다. 모든 감각이 손 끝에서 피어나는 순간이다.


손 끝에 힘을 가만히 흘려넣는 시간. 음절 하나, 자음 하나. 모음 하나를 적을 때마다 가끔은 단어를 입술에 품어보기도 하고 소리를 내어보기도 한다. 눌러 쓸 때 손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을 손가락에서부터 손등, 팔목까지 가만히 느낀다. 아, 이 글자를 쓸 때는 이렇게 힘이 들어가는구나. 새삼스레 알아채면서 다른 상념들과는 서서히 멀어진다. 순간에 고요히 집중된다. 그렇게 문장 하나를 완성하면서 나는 내 세계 하나를 짓는다. 본래 완성되어 있던 문장을 새 종이에 내 밀도대로 다시 심어 넣는 작업. 어쩌면 나는 필사에 대해 그렇게 정의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12월의 마지막 주 어느 날에는, 1월을 시작하며 하고 싶은 것들을 다이어리에 리스트업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중 가장 기대했던 것이 '아침 저녁으로 필사하기'였고, 지금 기쁘게 그 일을 해나가고 있다. 아침을 문장으로 열고, 하루를 감각으로 닫는다. 한달 동안 많은 문장들을 만나며 조요히 내 세계를 조금씩 넓혀가게 되겠지. 새삼 읽어야 할 문장이 많아서, 써야 할 문장이 가득해서. 좋은 책들이 많은 시대에 살아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독도독, 타이핑으로 적어 넣는 글은 빠르게 완성할 수 있어 좋지만, 가끔은 조금 느긋한 불편함을 애써 선택하고 싶을 때도 있다. 손으로 '쓴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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