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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역의 첫 낱말이라면, 역시 기억이라고. 낱말이거나 낱말이 아닌 말들을 정돈하며 생각했다. 머리가 어느 정도 자라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을 구분할 수 있을 때부터 기억에 남는 것들을 종이에 기록하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내게 기억은 늘 기록과 함께 붙어 다니는 낱말. 같은 것이었다. 밀리지 않고 그림일기를 쓰던 꼬마는 왜인지 행복하지 않을 때에만 일기를 남기는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사실 남겨두지 않으면 잊힌다, 는 감각은 꽤 오랫동안 마음을 지배해 왔다. 강렬하게 남는 기억일수록 오래 잡아채고 싶었다. 스무 살 남짓 되어 사진을 취미로 시작한 것도 사실 같은 이유였다. 라디오나 음악에 집착하던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기록병 환자처럼 기억을 수집했다. 어떤 공간에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 걷던 길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장면을 담았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온라인 공간에 글을 썼다. 그저 그런 일상들을 잘 수집해서 그런대로 전시했다. 내 이름과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url을 단 공간들이 사방팔방 늘어났고, 아직도 내 20대의 기억들은 일부 기록으로써 어떤 웹 공간들을 부유하고 있다. 다시 읽기 부끄러운 자모음도 많지만 참 애썼구나, 생각하게 되는 순간들이 퍽, 싫지는 않다.
그제 출근길엔, 스마트폰 앱 푸시 알림으로 어떤 무지개 사진이 덩그러니 떴다. 3년 전의 내가 어디선가 잠시 멈췄던 흔적이라고 한다. 어, 3년 전 오늘이네. 싶어 어색하면서도 또 반갑다. 잊고 지냈지만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는 장면들을 요즈음은 문명의 발달 덕에 (써놓고 보니 촌스럽기 이를 데 없는 표현이지만) 조금 더 쉬이, 가까이 알게 되는 느낌이다. 오래된 책을 펼쳤을 때 툭, 하고 떨어지는 누군가의 쪽지 같은 간지러움은 없지만 어딘가에서 이렇게 '있었음'을 빼꼼, 발견하게 되는 순간들이 참 머쓱하게 반갑다. 이전만큼 기억을 남겨두려 아니면 악착같이 기록하려는 마음은 없지만 단지 지금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흐린 눈으로 그랬었지, 하고 웃을 언젠가의 나를 위해서 손가락을 좀 움직여야지, 싶다. 그래서 시작해 본다. 기역부터 히읗까지. 내가 좋아하거나 애정 하거나 혹은 더 이야기해 보고 싶은 것들에 대한 별 것 아닌 기록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