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마도 Aug 03. 2021



좋아하는 끝, 들이라면 잔뜩 있다. 


우선 여름의 끝, 다 꺾이지 않은 더위가 선선한 바람을 데려올 때.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불을 켜지 않는 독립영화관을 사랑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끝을 알고 있는 책. 줄거리나 결말을 알고 있어도 몇 년을 주기로 다시 펼쳐보게 되는 페이지들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읽을 때의 공기와 분위기들로 인해 다시 다른 감상들이 쓰이기도 한다. 

글을 쓸 때 가장 마지막에 찍는 마침표. 가만히 찍혀 있는 마지막 줄의 온점을 볼 때마다 이건 단정하게 끝난 이야기구나. 생각하게 되거든.


그 외에도 재잘대고 싶은 좋아하는 끝들은 잔뜩 있지만, 요즈음은 컵에 에스프레소 샷을 넣고 물에 잉크처럼 퍼지는 것을 본 후 얼음을 컵의 6미리까지 담아서 플라스틱 컵의 뚜껑까지 똑, 하고 닫는 루틴을 사랑한다. 

하루의 다섯 시간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커피 전문점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루틴이다. 18초에서 23초 사이에 내려오는, 세 가지 층의 샷이 온전히 구분된 잘 추출된 에스프레소를 샷 글라스에서 컵에 부어 '끝'을 내는 루틴까지도 제법 신이 나지만. (사실은 샷이 빠질 때, 내 손 아래에 금세 받은 정수가 어떤 소용돌이로 퍼지고 있는지를 안다면 누구라도 두근거리겠지.) 가장 즐거운 것은 얼음을 한 번에 내가 기억하는 감각대로 퍼 넣고 마지막에 리드를 똑, 하고 닫아 음료를 받을 사람에게까지 슬라이딩되는 바로 그때의 감각이다. '똑' 하고 내가 기억하는 정도의 힘으로 리드를 눌러 닫을 때 온전히 이 과정을 끝냈구나. 생각하게 되어 묘한 뿌듯함이 밀려오는 것이다.


사실, 끝났다. 가 기쁘거나 행복할 수 있는 건, 고민하던 과제나 과업을 끝내거나 오늘의 먹고사니즘을 충실히 이행했을 때. 아닐까, 여전히 어떤 끝은 슬프고 어떤 끝은 괴롭다. 끝, 이라는 말 하나를 두고 보면 어떤 절망감이나 눅진한 무게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끝은 시작과 맞닿아 있어' 같은 말은 이 묵직함을 애써 모른척하려 만들어진 말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절이 지나면 또 다른 계절이 오고 꽃이 피면 또 졌다가 다시 피고. 오늘이 끝나야 내일을 만날 수 있다. 어떤 마음이 시작된다면, 그 마음이 질 때까지. 끝날 때까지 오롯이 책임지고 싶은 마음. 그러니까 피는 꽃의 아름다움을 본다면 지는 꽃의 처연함도 인정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매일을 지내고 싶다. 끝이 마냥 설레진 않지만 다 무겁지 않아 다행인 걸까. 조금만 참고 견디면 또 좋아하는 여름의 끝을 만나게 된다. 올해 여름 끝에는 어떤 곡을 들을지 미리 고민해 볼 참이다. 




이전 01화 기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