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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 Aug 04. 2021

고구마

조금 쌀쌀해지는 계절이 오면 나는 두 가지를 기대한다. 하나는 새로 드라이해 다음 계절을 위해 보송보송하게 개어둔 스웨터고, 하나는 은근한 온도에서 오래 굽는 '고구마'다.


늦가을쯤 되면 올해의 '베니 하루카'는 언제 주문하면 좋을까 즐거운 고민에 빠지곤 한다. '구황작물의 계절이 왔다고요 여러분' 동네방네 떠들고 싶은 기분은 덤이다. 새삼스럽지만 열을 가해 찌면 포슬포슬해지는 것들을 좋아한다. 감자도 좋아하지만 역시 내 취향은 조금 달큼한 쪽이다.


흙이 잔뜩 묻은 고구마들이 가득 든 박스가 집에 도착하면 쟁여두었던 신문을 펼쳐 후숙 준비를 한다. 겹치지 않게 고구마를 늘어놓으며 달아져라, 달아져라. 혼자만 알고 말 주문을 외는 거다. 우습지만 꽤나 경건하다. 겨울의 의식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2-3일 후숙 된 고구마들 중 몇 개를 골라 처음 물에 헹구기 시작하는 순간을 또 사랑한다. 손에 남는 차가운 물의 감촉. 적당히 식은 손으로 나는 고구마를 다듬는다.

도마 위에 고구마를 올리고 칼질을 시작하면 제법 단단한 경도에 초반엔 써는 힘을 조절하는데 꽤 기운을 써야 한다. 껍질을 벗기지 않고 채 썰어 만드는 고구마 스틱을 좋아하는데 감자보다 조금 더 아슬하게 힘을 주어 잘라야 하는 그 감각이 퍽이나 마음에 든다. 그 이후엔 커다란 보울에 감아 물기를 깨끗하게 제거한 후 늘어선 고구마 스틱에 오일을 조금 바른다. 에어프라이어 안에서 고구마가 익는 동안 뒤집기까지 시간이 걸리니 노래나 한 두어 곡 들을까, 하고 노래를 고르게 되는 순간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겨울의 아침식사로 찐 고구마를 선택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인 일인데 조금 앗뜨앗뜨, 한 상태에서 고구마를 반으로 툭 쪼개면 달콤한 단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게, 오늘도 고생이 많겠구나 싶은 나를 위로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메뉴라는 생각을 한다. 달고, 따뜻하고 상냥하게 이를 데 없는 먹을거리.


8월이긴 하지만 벌써부터 고구마 생각이 날 때가 있어 가끔 아이스 고구마 같은 것들에 눈을 돌려보기도 한다. 그런데 역시 고구마는 호호 불어먹는 맛이지, 생각하면 결국 구매를 포기하게 되더라. 겨울을 기다리게 하는 것들을 기다렸다가 그 계절에 먹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서일까.

결국 올해도 궁금했던 아이스 고구마는 먹어보지 못하고 하릴없이 여름이 지나버릴 것 같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자연히 오게 될 겨울을 기다려야지.

모든 것들이 순리대로,

또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될 것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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