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여름의 나무를 좋아한다, 땡볕이 쨍쨍 내리쬐이는 가로수 어느 즈음에 단단히 서 있는 모습들 사이에서 매미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오면 조금 더. 엄마는 여름의 나무에 붙어 우는 매미 울음소리를 좋아하셨다. 그 자체가 여름 같다고. 우는 소리가 다른 걸 신기해하시며 가끔 베란다 너머로 매미 울음소리가 넘어오면 '세월, 세월, 하고 우는 것 같지 않니?'하고 내게 되묻곤 하셨는데, 사실 그때부터 나는 나무, 하면 여름을 함께 떠올리게 되었다.
스물넷, 무언가를 하며 밥벌이를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상업사진을 선택하게 되었고, 그 길로 쭈욱 12년을 이미지를 담고 만지는 작업들을 끊임없이 해 오면서 내 개인작업의 화두는 늘 '초록' 아니면 '빛' 이 아니었다 싶다. 빛 부족 환자처럼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빛을 담았다. 빛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단연코 나무였다. 잎이나 가지 틈새로 손가락 프레임을 이리저리 옮기다 보면 어떤 부분에서 아릇하게 빛이 퍼질지, 감이 왔다. 그래서인지 초록에 대한 이야기를 참 오래 했었고 그 작업을 보이는 곳에도 참 많이 걸었다. 매 계절이 곱지만 나무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역시 잎이 초록인, 여름이었다.
때로는 뜨거워서, 쳐다볼 수 없는 여름의 쨍쨍한 초록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있었고, 가끔 나는 그 초록에서 앞을 걸어갈 기운을 얻었다. 더운 바람에 흔들리는 잎들을 보고 있으면 잎이 달린 가지, 가지가 달린 기둥. 기둥이 뿌리내렸을 흙까지. 나무 자체의 단단하고 단정한 매무새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무가 나무인 데는 사실 큰 이유가 없고, 원래부터가 그랬을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서 붙박여 날씨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잎을 떨구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면서도 스스로의 뿌리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 전에 좋아하는 사람이 내게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습기 가득한 여름 위를 걸으면서 나는 나무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꽤나 비장한 표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지금 와 새삼 든다. 돌멩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아예 딱딱한 콘크리트 같은 거여도 사실 상관은 없을지 모르지만 나무처럼 단단하게 서서 가끔은 떨어지기도, 흔들리기도 하면서 세월을 올곧게 흐르고 싶어서.
조만간 아버지의 기일이 돌아온다. 산소 뒤에 백일홍 나무가 서 있는데, 그 나무는 올해도 예쁘게 꽃을 피웠겠지. 잎이 떨어진 나무도, 봄꽃을 잔뜩 피운 나무도 물론 아름답지만. 역시 나무, 하면 여전히 여름의 기억들이 선연하다. 늘 그 자리에 서 있어서 당연한 듯 여기다 보이지 않게 되면 당연하게 그리워지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 바로 지금. 한 계절을 위해,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해 아름답게 일생을 태우고 있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다른 계절의 시작이 오면, 아마 나는 또 여름의 나무를 그리워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