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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 을 처음 접했다. 딱딱한 번역본을 글자가 닳을 정도로 읽었던 기억이 선연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번역본 사이에는 바르트가 사진을 이미 죽어버린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명명하는, 꽤 단호하면서도 분명한 결론이 있었다. 나는 그 결론을 증명하는 '그것이 거기에 있었음' 이란 명제에 꽤나 매료되었다. 그 책을 읽은 이전과 이후, 집의 오래된 앨범을 펼쳐볼 때의 내 시각이 달라졌음을 느꼈으니까.
내가 이미 담은 순간들이, 거기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동시에 이미 죽어버린 순간이라는 그 두 가지의 시점이 공존하는 것이 바로 사진이라는 짜릿함. 상업 사진을 할 때에도, 취미로 사진을 접할 때에도 이 짜릿함이 나를 끌어당기는 힘은 굉장했다. 사진에 무엇보다도 큰 매력을 느꼈던 것이, 단순히 찍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는, 그런 강렬한 직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도 같다.
무엇보다도 사진의 인화물이 가진 힘을 믿는다. 필름밖에 사용할 수 없었던 빛바랜 예전 사진들은 시각적으로도 '이전의 역사' 같은 티가 완연히 나지만, 무엇보다도 닳은 모서리 같은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촉감적인 부분에서도 완벽하게 시간의 흐름을 재현한다. 종종 테두리에 100년 사진 같은 작은 글자가 인쇄되어 있으면 그게 또 묘하게 좋다. 100년을 유지해 준다는 사진의 색깔도 빛과 시간에 노출되면 결국 바래버리고 마는 거지. 싶어서. 인화물은 그 자체로 시간의 흐름을 재현해 준다. 시간이 흘렀구나, 이 장면 안에 있는 것이 이미 예전의 그것이구나. 손으로도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으니까.
사진을 그만두고 새 일을 시작한 이후로는, 사실 예전만큼 인화물에 손이 닿을 일이 없다. 최근에 오랜만에 인화라도 좀 해볼까, 하고 앨범을 열었다가 찍은 사진이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내 조금 아쉬워졌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필름 두 통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오랜만에 기계식 카메라 뒷뚜껑을 열고 필름을 끼우면서, 이번 롤은 지금 시작하면 언제 맡길 수 있을까, 를 생각했다. 서른여섯 컷 한 롤을 다 채우는 데에 계절이 몇 번 흘러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급할 건 없지, 사실은 담고 싶은 순간보다 담기는 순간이 더 의미 있는 법이니까. 천천히 어떤 순간들을 완성해 손으로 만지고 싶은 것들을 손에 쥘 수 있는 형태의 인화물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며 나는 필름의 와인더를 지익, 지익.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