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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 Aug 25. 2021

보리차

어릴적, 우리 집은 늘 동네 약수터에서 물을 떠다 마셨다. 엄마는 그렇게 떠 온 물을 보리차로 만들어 유리병에 담았다. 지금은 나오지 않는, 델 어쩌구라는 회사에서 나오는 오렌지 쥬스 병을 깨끗하게 씻어서. 냉장고를 열면 늘 보리차가 있었던 풍경. 너무 익숙한 감각이라 지금 떠올려도 그리우면서 담담하게 그랬었지, 싶은.


고소하고 구수한 향. 유리 물잔에 담긴 보리차를 보고 있으면 맹물은 조금 밍숭맹숭하지 않나, 싶은 생각을 한 적도 있었더랬다. 무엇보다 한 모금 마시면 입안 가득히 퍼지는 보리 향이 좋았다. 아, 이게 보리의 향이구나. 어렸을 때부터 기억으로 남은 익숙한 향이나 맛이 여러가지 있지만 그 중에 최고를 꼽자면 아마 투명한 유리잔에 담아 마시던 보리의 향일 것이다. 보리차에 대한 기억은 무언가 늘 내 일상과 함께했다, 는 느낌이어서 마치 어릴 때의 애착장난감처럼 아직도 내 기억속에 고스란히 애틋하게 남아 있다.


독립을 하면서 정수와 냉수, 얼음이 나오는 정수기가 붙은 냉장기를 샀다. 자연스레 보리차를 마실 일이 거의 없어진 일상에, 겨울에 따뜻환 보리차를 끓여야겠다거나 여름엔 냉장고에 식혀서 유리병에 차갑게. 같은 실행력이 솟을리 만무했다. 노오란 색의 티백 패키지를 가끔 보게 되어도 무심히 지나쳤던 것 같은데, 얼마 전 엄마가 챙겨주신 먹을 것들 보따리에 가만히 담겨있는 보리의 씨앗을 보고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 보리 씨앗.


그 날 저녁에는 조금 이르게 식사를 하고, 보리를 깨끗하게 맹물에 씻어 유리 주전자에 정수를 가득 붓고 그것을 팔팔 끓였다. 강불로 올렸다가, 서서히 약불로. 천천히 끓는 소리가 나고 보리 씨앗이 유리 포트에 하릴없이 몸을 부대끼는 것을 지켜보았다. 끓기 시작하자 따뜻하고 고소한 향기가 집 안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내게 너무 익숙했던, 익숙했지만 잊고 지냈던 따뜻한 향기가 마음을 은은하게 뎁히기 시작했다. 에어컨을 조금 약하게 켜고 다 끓인 보리차를 담아 호호 불며 한 모금 마셨다. 이 좋은 걸 왜 잊고 살았을까, 하는 생각하기에 앞서 아 맛있다. 하는 감각이 먼저 슬몃, 올라와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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