ㅂ
오늘은 잠시 비가 오다 갰다, 저녁을 먹은 후 분리수거할 박스들을 들고 내려가 보니 땅은 젖어 있고 반소매를 입은 팔에 닿는 온도가 놀라울 정도로 선선했다. 어젯밤과는 다른 느낌. 가을이 코앞이구나, 느껴지는 공기 앞에서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박스를 접었다. 손을 탁 탁 털고 올라오는 길 괜스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마스크 틈새로 들이찬 공기가 선연하게 맑았다.
비가 오는 날씨도 좋지만, 사실 비가 좋은 건 비가 오고 난 이후 느낄 수 있는 것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젖은 땅 냄새, 흙냄새. 유난히 낮아지는 채도, 그런데도 젖은 땅과 빛이 만나면 쨍하게 높아지는 색 대비. 땅 위에 생기는 물웅덩이, 웅덩이에 반영되는 건물이나 하늘. 평소와 같은 풍경이 달라지는 마법 같은 순간들을 만나게 되니까. 비 온 후 맑게 갤 때, 혹은 땅이 젖어있는 동안에 공기가 씻겨 내려가 한층 맑아진 공기를 맡을 수 있는 그 어느 경계를 기대하게 되던 어떤 순간부터, 내리는 비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솨아아 시원하게 내릴 때의 비에 신발이 질펀하게 젖는 건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어제는 비가 샤프심처럼 온다, 고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적었다. 비가 내릴 만큼 내렸구나, 하고 맑은 날 아침 집을 나설 때의 풍경처럼 언젠가 내가 겪는 이 뾰족뾰족한 날들도, '겪을 만큼 겪었구나.' 여길 날이 오겠지. 아니, 무지개라도 뜨면 참 좋겠다. 스물셋. 왜 이렇게 매일 울게 될까요, 묻던 나에게 '내일 무지개가 뜨려고 그러나 보죠.' 대답해주던 어떤 어른이 떠오르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