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마도 Aug 31. 2021

시작


어떤 시작들을 넘어왔나, 하루는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결정을 했는지,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것보다도 어떤 시작들이 있었나. 하는. 마치 나무가 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줄곧 잊고 지내다 태풍에 홀연히 꺾여나간 자기를 보며 우연히 아, 나무의 뿌리는 흙 속에 단단히 박혀 있겠구나. 하고 무심히 떠올리는 것과 비슷하게.


사실 나는 어떤 것을 시작하는 데에 크게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다. 좋아하는 것들이 잔뜩 있어서일까, 새로이 취미를 시작하거나 흥미거리를 늘리는 것에 익숙하다. 이거 해볼까, 저거 해볼까. 하고 건드린 것들이 오버 조금 보태서 수만 개다. 해보지 않은 것들도 많겠지만, 그만큼 해본 것들도 많다. 시작은 편안하게, 그리고 우선 시작하면 어느 지점까지는 흥미를 가지고 한다. 그리고 딱 그 정도, 그 이외의 영역에는 진입하지 못한 채 멈추거나 내려놓게 된다. 깊어지려면 전문적인 영역까지 진입해야 하는데 어렵지 않은 마음으로 시작한 것에는 그만큼의 열의가 생기지 않는 것도 있고, 내가 썩 영리하지 못해서 즐기려면 여기 까진가 봐, 쓸데없이 쿨해지기 때문인 것도 있다.


최근에 시작한 것은 50일 동안 다른 주제로 글을 쓰는 프로젝트다. 스스로를 조금 더 잘 알기 위해 시작하게 되었다. 50일 동안 꾸준히 쓰려면 적어도 주제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흰 메모장을 펼친 다음 좋아하거나 더 이야기해 보고 싶은 것들을 주르륵 적었다. 기역에서 희읗까지 낱말들을 모아 숫자를 매겼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나서 달라진 것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글을 쓰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이고 책을 내보고 싶다는 조금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았던 꿈도 조금은 손끝에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매일 어떤 것을 해내고 있다는 감각이 조금은, 뿌듯하다.


피아노를 시작한 것은, 조용한 목소리를 가졌던 단발머리 옆 집 언니 덕이었다. 여섯 살 때 언니네 집에 자주 놀러 가곤 했는데 그때 언니네 집 작은 방에는 까만 피아노가 한 대 있었다. 언니가 치는 피아노를 듣고 있던 나는 옆에서 곡조를 듣다가 줄곧 따라 치곤 했다. 양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모른 채 뜨문뜨문 언니가 치는 손가락 자리를 따라 짚었다. 어느 날 언니는 내 손을 잡고 사과를 깎는 엄마 앞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피아노 학원 보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시작'에 대한 기억이다. 

이전 16화 사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