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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 Sep 16. 2021

피아노 선생님

어렸을 때 '장래희망이 무언지' 질문을 받을 때는 늘 접었다 결국 펴지 못하는 손. 같은 느낌으로 대답이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렇게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조그맣게 피아노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답변하고 싶었다. 여섯 살 때 시작한 피아노를 열넷까지 계속해서 치면서 많은 악곡들을 만나고, 많은 포도알을 채색했다. 손등을 때리던 선생님도, 연습도 하지 않고 완성한 그날의 포도알을 모른척해주는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열한 살 즈음 만났던 피아노 선생님이 지금도 기억에 참 많이 남는다. 


나는 일주일에 두어 번, 선생님 댁으로 개인 교습을 다녔다. 선생님은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고 계셨기에, 집에 들어서면 늘 나를 반기는 푸들을 가장 먼저 만났다. 조율이 약간 덜 된 듯한 오래된 피아노 앞에서 선생님은 나를 가르치셨다.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리 무언가 다그치거나 강요하지 않으셨고, 악곡 하나가 끝나면 그 악곡 하나를 통째로 외게 하셨다. 다만 그 곡을 다시 연주할 때에는, 악상 기호와 페달만은 내게 자유로이 선택권을 넘겨주시곤 했다. 네가 치고 싶은 대로 치렴. 표현하고 싶을 때 표현하는 게 좋은 거란다. 선생님의 그 방식은 나를 아주 자유롭게, 편안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은 베토벤, 어느 날은 쇼팽, 또 어느 날은 모차르트. 나는 기억 속에 악보를 넣되, 그 곡을 연주할 때에는 그날의 내 기분을 꺼내어 표현했다. 커지고 싶을 때 크레셴도, 작아지고 싶을 때 데크레센도. 마디가 시작하는 부분이 아니라도 여운을 즐기고 싶을 때에는 페달을 밟았다 떼었다. 어떻게 표현하더라도 선생님은 그것이 틀린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법이 없었다. '앞으로 피아노를 전공할 생각이 없니,?' 하고 선생님이 내게 물으셨을 때, 전공이라는 말을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그때의 나는 그저 철없는 꼬맹이였다. 


그 이후로 나는 아버지의 전근으로 인해, 선생님과 헤어지게 되었다. 부모님께 말씀드린 '전공' 어쩌고는 사실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었고, 열넷이 되어버린 나는 이사를 가게 되면서 피아노를 완전히 그만두게 되었는데 어찌 보면 사실 예상된 수순이었다. 포도알을 색칠하던 것보다, 손등을 맞던 것보다, 악곡 하나를 외워 누군가 앞에서 연주하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손의 힘을 넣었다 빼었다 하던. 그 어느 즈음의 기억이 유난히 선연한 것도 어쩌면 예상된 일일지 모른다. 그때 나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기쁨을 알았고, 피아노 앞에서 어떤 것을 표현하는 즐거움을 배웠다. 악곡의 악장 하나를 통째로 외던 암기력은 중학교 내내 영어단어 시험을 칠 때에 꽤나 유용하게 써먹기까지 했다. 이건 우스갯소리긴 하지만. 


지금 나는, 이제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가끔은 전원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오래된 디지털 피아노를 한 대 갖고 있을 뿐이다. 손가락이 많이 굳어버려,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놀기에 무언가를 수려하게 연주하는 것에는 어려움을 느끼지만 다행히도 아직 악보를 읽는 눈이 죽지 않아, 마음이 고단한 날 건반 앞에 앉았을 때 한 곡을 완곡할 수 있는 정도의 감각 정도는 남아있다. 어렵고 복잡한 곡들은 시간이 좀 걸리지만, 아직도 여전히 손가락이 기억하고 있어 악보 없이 연주할 수 있는 곡들도 몇 곡 있는데. 역시 이것 또한 다 그때, 그 선생님 덕이다. 가끔씩 피아노 앞에 앉아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던, 그렇게 이야기해주는 듯한 선생님의 레슨 시간을 떠올릴 때가 있다. 조금 더 편안하게 나를 보여주려 했다면 지금 조금은 달라졌을까, 여전히 나는 솔직하면서도 나를 다 보여주지 못하는 어른으로 살고 있다. 가끔은, 지금은 지긋이 나이가 드셨을 어딘가의 선생님께 여쭙고 싶을 때가 있다. '선생님, 그때 저를 가르치면서 행복하셨나요? 저는, 그때의 선생님과 함께 피아노를 칠 수 있어서 참 행복했습니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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