꿰매는 사람들

단편소설

by 순진한 앨리스


1. 용희리의 작은 정형외과병원


접수처 옆 주사실 문이 살짝 열릴 때면, 그 특유의 소리가 들려온다.

“으흠~ 음~”

그 소리만으로도 접수는 끝난다.

할아버지 박광식 씨는 병원의 단골이다.

매일 어디선가 살짝 다쳐서 드레싱을 받으러 온다.

접수처 직원도, 간호사도, 원장님도 그의 으흠 소리에 익숙하다.

“할아버지, 오늘 또 다치셨어요?”

간호사 채원 웃으며 묻는다.

“아, 그냥 살짝 부딪쳤는데… 피부가 약하니깐 그냥 벗겨지네.”

할아버지는 머쓱한 듯 웃는다.

“그만 좀 다치세요.”

“알았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내일도 으흠~ 하고 들어올 게 분명하다.

채원은 드레싱을 하며 할아버지의 팔을 살핀다.

얇아진 피부, 자주 생기는 멍, 그리고 그 아래로 흐르는 세월의 흔적.

할아버지는 말수가 적지만, 병원에 오면 꼭 한두 마디는 건넨다.

“요즘 날씨가 선선하지?”

“어제는 시장에 갔는데, 고등어가 싱싱하더라고.”

그의 말은 짧지만, 그 안엔 하루가 담겨 있다.

작은 도시의 작은 병원.

그곳에서 채원은 사람들의 하루를 만나고, 그 하루를 조금씩 꿰매준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병원 안은 조금 조용해졌다.

같이 일하는 수겸쌤이 말했다. “으흠~ 소리가 없으니 허전하네.”

일주일째 되던 날, 문이 열렸다.

“으흠~ 음~”

“할아버지!”

채원이 반가움에 소리를 높인다.

“아, 그냥 집에 있었어. 감기 기운이 있어서.”

“괜찮으세요?”

“응. 근데 오늘은 무릎이 좀 까졌네.”

채원은 웃으며 드레싱을 준비한다.

할아버지는 오늘도 병원에 왔다.

그리고 병원은 다시, 익숙한 하루를 되찾았다.

“너무 아파, 빨리 진통제 좀 놔줘.”

문을 열며 들어선 박현정 씨는 오늘도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용희리의 작은 병원, 그곳의 단골 중 한 명.

60대 중반, 유통업에 종사하며 통풍을 앓고 있는 남자.

이름만 보고 처음엔 여자분인 줄 알았던 채원은, 그가 처음 왔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어제 또 술 드셨어요.”

채원이 익숙한 듯 물었다.

“많이 먹지도 않았어. 딱 한 잔만 했는데 증상이 바로 나타나네.”

현정 씨는 변명인지 고백인지 모를 말을 툭 던졌다.

“통풍에 술이 안 좋은 거 모르세요?”

채원은 주사를 준비하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 속엔 걱정이 묻어 있었다.

현정 씨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는다.

“알았어. 오늘은 안 마실게.”

채원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잔소리를 한다.

하지만 그 잔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만큼 채원과 환자들 사이엔 거리낌 없는 친밀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사 바늘이 들어가고, 약물이 몸속으로 퍼진다.

현정 씨는 숨을 고르며 말한다.

“그래도 한 잔은 참 어렵더라고. 일 끝나면 그게 낙인데…”

채원은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의 고집도, 그의 아픔도, 그의 하루도 이 병원에선 익숙한 풍경이었다.



2 장날의 여유


오늘은 장날이었다.

용희리 시골에서는 5일마다 장이 서는데, 끝자리가 4일과 9일인 날이면 마을 전체가 들썩인다.

장날이면 병원도 조용해진다.

평소엔 여기저기 아프다며 찾아오던 어르신들도, 이날만큼은 병원보다 장터를 먼저 찾는다.

“오늘은 한가하네.”

채원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을 바라본다.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골목 너머로, 사람들이 손수 가꾼 농작물을 들고 장터로 향하는 모습이 보인다.

병원 안은 평소보다 한결 느긋하다.

접수처도 조용하고, 주사실도 한산하다.

원장님도 오늘만큼은 진료실 문을 살짝 열어두고, 책을 펼쳐놓은 채 고요한 시간을 즐긴다.

장날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일터이자 축제다.

직접 키운 배추, 고구마, 들깨, 그리고 손수 만든 된장까지 그 모든 것이 장터에 나가면 누군가의 밥상이 되고, 누군가의 대화가 된다.

병원도 그런 날엔 잠시 숨을 고른다.

늘 아픈 곳을 살피던 손들이, 오늘은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여유를 느낀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채원은 생각한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그래야 내일 다시 바쁘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119 구급차가 병원 앞에 도착했고, 한 할머니가 실려 들어왔다.

“화장실에서 미끄러지셨대요.”

구급대원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근데 계속 ‘용희! 용희 병원!’만 외치셔서… 다른 데로는 못 가겠더라고요.”

그 할머니는 병원의 단골이었다.

이현태 원장을 맹신하는 분으로, 아프면 무조건 이 병원부터 찾는 분이었다.

원장은 로비로 나와 할머니 상태를 살폈다.

머리가 살짝 찢어져 있었고, 허리를 다쳐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였다.

입원실도 없고 중증 환자를 받을 수 없는 1차 병원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예외였다.

“일단 엑스레이부터 찍읍시다.”

원장의 말에 직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촬영 결과,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머리는 봉합했고, 허리엔 통증 주사를 놓았다.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던 할머니는 이내 웃으며 말했다.

“역시 우리 이 원장님이 최고라니까.”

원장은 웃었지만, 끝까지 당부를 잊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머리가 아프거나 속이 울렁거리면, 바로 응급실로 가셔야 해요. 꼭 이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병원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지만, 모두의 마음엔 작은 긴장이 남아 있었다.

이렇듯 긴장과 평온이 교차하고, 단골 환자들의 잦은 방문이 이어지며 병원의 하루는 흘러갔다.

다음 날 아침, 채원은 늘 그렇듯 병원 문을 가장 먼저 열었다.

진료 시작 전, 조용한 병원 안에서 그녀는 하나씩 준비를 해나갔다.

“오늘도 박광식 할아버지 또 다치셔서 오시려나? 박현정 씨도 오시겠지…”

단골 환자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오르며, 채원은 익숙한 하루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역시나 그랬다.

“으흠~ 음~”

특유의 소리를 내며 박광식 할아버지가 병원 문을 밀고 들어섰다.

오늘은 손에 요구르트 한 봉지를 들고 있었다.

“나 또 다쳤어.”

할아버지는 오른쪽 발 뒤꿈치를 내보였다.

휴지로 감싸놓은 상처를 풀자, 피가 흘러나왔다.

꽤 깊게 찢어진 상처였다.

“어쩌다 이렇게 되신 거예요?”

채원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 내가 계단 내려오다가 마지막 계단에서 헛디뎌서… 찢어졌네.”

할아버지는 머쓱하게 웃었다.

“쫌 조심 좀 하시지요.”

채원은 늘 그렇듯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그 말투 속엔 걱정과 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요구르트 한 봉지는 할아버지의 미안함이었다.

너무 자주 다쳐서, 너무 자주 찾아와서, 오늘은 뭔가라도 들고 오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것 같다.

이현태 원장이 상처를 살폈다.

“이건 봉합해야겠네요.”

말이 끝나자마자 봉합 준비가 시작됐다.

병원은 다시 분주해졌고, 채원은 익숙한 손길로 할아버지의 상처를 감쌌다.

그렇게 또 하루가 시작되었고, 별다른 사건 없이 오전 진료가 지나갔다.

조용한 흐름 속에서 채원은 오후 진료 준비를 하며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박현정 씨가 병원 문을 밀고 들어섰다.

예전보다 훨씬 핼쑥해진 얼굴이었다.

통풍이 심해져 관절마다 통증이 퍼졌고, 허리, 어깨, 무릎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고 했다.

결국 허리 수술까지 예약했다고 말했다.

“수술 전까지는 통증 때문에 주사 맞으러 계속 와야겠어.”

현정 씨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속엔 지친 기색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

요즘은 정말 힘든지, 술도 끊고 치료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가 술을 끊었다는 말에 채원은 놀라면서도 반가웠다.

“잘 선택하셨어요. 지금부터라도 건강 챙기셔야죠.”

채원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 말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으로서의 진심이었다.

현정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아프지만, 그래도 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병원은 그렇게 또 하루를 지나고 있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다쳐서 오고, 누군가는 아픔을 견디며 변화를 선택한다.

그리고 채원은 그 모든 순간을 조용히 지켜보며, 사람들의 작은 용기를 꿰매고 있었다.


3. 병원으로 돌아갈 이유들


오늘도 다른 날과 변함없이 박광식 할아버지의 드레싱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방광식 할아버지 드레싱을 다 마치고 왔을 때 수경쌤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채원쌤, 그런데 요즘 박현정 씨가 안 보이네요? 수술하셨다던데… 그래도 안 오시니까 좀 신경 쓰여요.”

그 말을 듣고 채원도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이 잘 됐더라도, 박현정 씨는 통풍을 앓고 있었기에 약을 꾸준히 복용해야 했다.

통증이 없더라도 병원에 들러야 하는 분이었다.

“진짜 그러네요. 수술은 잘 됐겠죠?”

걱정스러운 마음에 되물었다.

“잘 됐겠죠. 조만간 들리시겠죠, 뭐.”

수경쌤은 그렇게 말하며 주사실로 들어갔다.

채원은 마음속으로 ‘그렇겠지’ 하고 안심하며 다시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작은 공백이 남아 있었다.

채원의 하루는 늘 변함이 없었다.

단골 환자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낯선 환자들의 앓는 소리를 들으며 위로하고 치료하는 일.

가끔은 이 일이 좋으면서도 지겨웠다.

맨날 아픈 사람만 보고 있는 것도, 반복되는 일상도.

‘다른 직업을 찾아볼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채원은 잠깐 다른 길을 기웃거리다가, 결국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곤 했다.

우유부단한 성격 탓일까, 아니면 이곳에 남아 있는 정 때문일까.

그날도 그렇게, 익숙한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박현정 씨의 빈자리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날은 유난히 바람이 선선했다.

채원은 진료가 끝난 뒤, 병원 근처 공원 벤치에 잠시 앉았다.

늘 반복되는 하루, 아픈 사람들, 잔소리, 위로, 치료…

그 모든 것이 익숙하면서도 가끔은 무겁게 느껴졌다.

가방에서 꺼낸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채원은 생각했다.

‘이 일을 좋아하면서도, 왜 이렇게 지칠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잠깐이라도 병원 밖 공기를 마시는 게 도움이 되곤 했다.

그때, 저쪽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박현정 씨였다.

수술 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꼬마 간호사?”

현정 씨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꼬마 간호사는 박현정 씨가 붙인 별명이었다.

수경쌤은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서 롱다리 간호사 채원 작아서 꼬마간호사.

“어머, 박현정 씨! 정말 오랜만이에요.”

채원은 반가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병원엔 아직 못 갔어.”

현정 씨는 벤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괜찮으세요?”

“응 수술은 잘 됐어. 통증도 많이 줄었고. 술도 끊었어. 이제는 진짜 건강 챙기려고.”

채원은 그 말에 마음이 놓였다.

병원에서 늘 아픈 모습만 보던 그가, 오늘은 조금 더 건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다음엔 병원에도 꼭 들르세요. 얼굴 잊어 먹겠어요.”

“그럴게요. 요즘은 운동을 열심히 한느 라고.”

둘은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리고, 커피는 조금 식어갔다.

그 순간, 채원은 생각했다.

‘이런 시간이 있어서,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겠지.’

박현정 씨를 병원 밖에서 마주친 그날 이후, 채원은 다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일을 계속해도 될까?’

늘 반복되는 진료, 잔소리, 위로, 치료…

가끔은 지치고, 가끔은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그 일들이

그날만큼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아직은 괜찮은 직업이지 않을까.’

그렇게 채원은 마음을 다잡았다.

당분간은 다시 힘을 내서,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다.

그런 결심 뒤에는 오래된 기억이 있었다.

채원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외삼촌 집에서 자랐다.

그 집에는 동갑내기 사촌 지희가 있었다.

지희는 채원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외삼촌이 아무리 잘해주려 해도, 지희만큼은 아니었다.

지희는 아빠를 뺏기기 싫었던 마음에, 채원을 시샘했다.

저지르지도 않은 일들을 꾸며서 아빠에게 고자질하곤 했다.

채원은 억울했지만,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여기서도 쫓겨나면 어떡하지…’

그런 불안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잘못했어요”라고만 했다.

그렇게 채원의 자존감은 조금씩 낮아졌다.

자신을 변호하지 못했던 어린 날의 기억은,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병원에서, 환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채원은 조금씩 자신을 회복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아픔을 꿰매며, 자신의 마음도 함께 꿰매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박현정 씨의 회복된 얼굴을 보고

채원은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구나.’

그 생각 하나로, 다시 하루를 살아갈 힘이 생겼다.


4.박현정씨의 죽음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오신 한 환자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박현정 씨…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내일이 발인이래요.”

순간, 채원은 귀를 의심했다.

“네…?”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작은 의원이었기에, 건너 건너 다 아는 사이였다.

소식은 빠르게 퍼졌고, 그만큼 가까운 듯 먼 관계들이 얽혀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채원은 멍해졌다.

눈앞이 흐려지고, 가슴이 조여왔다.

그리고 눈에서는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며칠 전, 병원 밖에서 마주쳤던 박현정 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괜찮아 보였다.

조금 말랐지만, 웃었고, 걷고 있었고, “다음 주엔 병원에 갈게”라고 말했었다.

‘그게 마지막이었구나…’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그렇게 조용히, 그렇게 멀어질 줄은 몰랐다.

그건 단순한 환자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건, 마음 한 자리를 잃어버린 듯한 상실이었다.

채원은 부모님이 어릴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부모님의 사랑이 어떤 건지 잘 몰랐다.

어른이 되어도, 그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늘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감각 없이 자랐고,

외삼촌 집에서 지희와 함께 지내며

늘 조심스럽게, 늘 눈치 보며 살아야 했다.

그런 채원에게 박현정 씨는 특별한 존재였다.

“꼬마 간호사 왔네.”

그는 늘 그렇게 부르며, 채원을 챙겨주었다.

주사실에 들어설 때마다 웃으며 인사했고,

통증이 심한 날에도 “오늘은 네 얼굴 보니까 좀 낫네”라고 말했다.

그 따뜻한 말들이, 채원에게는 아버지의 말처럼 들렸다.

보호받는 느낌, 믿어주는 눈빛,

그리고 아무 조건 없이 건네는 온기.

그래서 박현정 씨의 죽음은, 부모님을 잃었을 때보다 더 큰 절망처럼 느껴졌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

채원은 병원 창가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목소리, 그의 웃음, 그의 고집스러운 말투.

그 모든 것이 마음속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그리고 채원은 생각했다.

‘나는 그분에게 치료를 해드렸지만,

그분은 내 마음을 치료해 주셨던 분이었구나.’

장례식장에 다녀온 채원은 조용히 마음속으로 빌었다.

“좋은 곳에 잘 가세요. 그곳에서는 통풍도 없고, 아픔도 없이 행복하게 지내세요.”

그 말은 속으로만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렸다.

그는 채원에게 단순한 환자가 아니고 아버지 같았고, 보호받는 느낌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다.

다음 날, 채원은 다시 용희 의원의 아침을 맞았다.

진료 준비를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박광식 할아버지가 으흠~ 하고 병원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할아버지! 항상 조심하세요.”

채원은 박현정 씨 일을 겪으면서 더는 잃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마을 했다.

“알았어. 잔소리 그만 좀 해. 요즘은 더 상처 낸 적도 없는데.”

할아버지는 투덜거리면서도 웃었다.

“다 할아버지 생각해서 하는 소리예요.”

채원은 웃으며 핀잔을 던졌다.

그 말은 걱정이었고, 애정이었다.

박광식 할아버지만은 오래오래 용희 의원에 다니셨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래서 괜히 더 잔소리를 하게 되는 거였다.

병원은 다시 익숙한 하루를 시작했다.

상실의 여운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채원은 사람들을 꿰매고,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병원은 다시 평소의 리듬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박광식 할아버지는 여전히 으흠~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들어왔고,

수경쌤은 여전히 “롱다리 간호사”라는 별명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채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박현정 씨의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가 앉던 의자, 그가 건네던 말투,

“꼬마 간호사”라는 별명이 병원 안에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그날 오후, 접수처에서 낯선 이름이 불렸다.

“김태훈 님, 들어오세요.”

진료실 문이 열리고, 중년의 남성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허리를 살짝 구부린 채, 발을 절뚝이며 걸어왔다.

“처음 오셨죠?”

채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네… 요즘 허리가 너무 아파서요. 근처라서…”

목소리는 낮았고, 눈은 조심스러웠다.

진료가 시작되고, 채원은 그의 옆에서 조용히 주사 준비를 했다.

그의 말투, 그의 표정, 그의 조심스러움이

어딘가 박현정 씨를 떠올리게 했다.

“요즘은 일도 줄이고 있어요. 건강이 제일이더라고요.”

그의 말에 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셨어요. 지금부터라도 챙기셔야죠.”

그 말은 익숙한 말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더 조심스럽게 건넸다.

진료가 끝나고, 김태훈 씨는 조심스럽게 인사를 했다.

“다음 주에도 올게요. 여기… 편하네요.”

채원은 미소 지었다.

“네, 언제든 오세요. 저희는 늘 여기 있어요.”

그날, 채원은 처음으로 박현정 씨의 빈자리에

새로운 얼굴이 조용히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현정 씨, 저 잘하고 있어요.

당신이 남겨준 따뜻함으로, 오늘도 누군가를 꿰매고 있어요.’



5. 새로운 직원 민지


가을이 깊어지던 어느 날, 병원에 새로운 간호사쌤이 들어왔다.
이름은 민지.
앳된 풋풋한 얼굴에,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부터 새로운…”
민지는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채원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채원이에요. 여기서 오래 있었어요.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요.”
민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병원에서 일하는 게 처음이라 많이 떨려요.”
그 말에 채원은 오래전 자신의 첫날이 떠올랐다.
주사 바늘을 잡던 손이 떨리고, 환자의 눈을 마주치기 어려웠던 그날.
그리고 박현정 씨가 “꼬마 간호사 왔네”라고 웃으며 불러줬던 순간.
그날 이후, 채원은 조금씩 자신을 꿰매며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그 따뜻함을 건네줄 차례였다.
“괜찮아요. 처음은 누구나 떨려요.
근데 여기 사람들 다 좋아요.
그리고… 잔소리도 좀 해요. 저처럼.”
채원은 웃으며 말했다.
민지도 웃었다.
“그럼 저도 곧 잔소리하는 간호사가 되겠네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근데 그 잔소리 속에 마음이 담기면, 환자들이 다 알아봐요.”
그날, 채원은 민지에게 병원 구석구석을 안내했다.
주사실, 접수처, 원장님의 성격, 단골 환자들의 특징까지.
그리고 마지막엔 이렇게 말했다.
“여기선 사람을 꿰매요.
몸도, 마음도.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에요.”
민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병원은 또 하나의 따뜻한 시작을 품게 되었다.

민지가 병원에 온 지 한 달이 되던 날이었다.
아직은 서툴지만, 주사 준비도 조금씩 익숙해졌고
단골 환자들의 이름도 하나둘 외우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박광식 할아버지가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으흠~” 하고 들어오긴 했지만, 표정이 무거웠다.
채원은 눈치를 챘지만, 일부러 묻지 않았다.
그럴 땐 오히려 조용히 곁에 있어 주는 게 낫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민지가 드레싱을 준비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할아버지, 오늘은 좀 힘드세요?”
그 말에 박광식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하다가
“어제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 하고 말했다.
민지는 멈칫했지만, 곧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많이 친하셨나 봐요.”
“응. 같이 매일 어울려 다녔지.
요즘은 자꾸 주위 사람들이 하나씩 없어져.”
민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드레싱을 마친 뒤, 작은 요구르트 하나를 건넸다.
“오늘은 제가 드릴게요.
할아버지, 내일은 조금 더 괜찮아지실 거예요.”
박광식 할아버지는 그 요구르트를 받아 들며 웃었다.
“꼬마 간호사도 요구르트 줬었는데…
이제는 너희가 다 컸네.”
채원은 그 말을 들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민지의 손길 속에,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왔던 날의 떨림이 겹쳐 보였다.
그리고 그 떨림이, 이제는 누군가의 위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날, 채원은 생각했다.
‘나는 이 일을 계속할 거야.
내가 받은 따뜻함을, 이렇게 이어 줄 수 있다면.’

일요일 오후, 채원은 병원 근처 작은 카페에 들렀다.
진료가 없는 날, 조용한 음악과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그녀에게는 소중한 휴식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치려던 순간,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박현정 씨의 아들, 박준호 씨였다.
채원은 잠시 멈칫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채원을 향해 다가왔다.
“혹시… 채원 간호사님 맞으시죠?”
“네… 맞아요. 현정 씨 아드님이시죠?”
준호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앉았다.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어요.
‘우리 병원에 꼬마 간호사가 있는데, 그 친구 보면 아픈 것도 좀 나아져.’”
채원은 그 말을 듣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도… 현정 씨 덕분에 많이 배웠어요.
그분은 제게 아버지 같았어요.”
준호 씨는 가방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이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예요.
병원에 전해달라고 했는데, 저는 간호사님께 직접 드리고 싶었어요.”
채원은 조심스럽게 봉투를 받았다.
그 안엔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꼬마 간호사, 덕분에 많이 웃었어요.
아플 때마다 꼬마 간호사 얼굴이 약보다 더 큰 위로였어요.
꼬마 간호사, 오래오래 사람들 꿰매주세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채원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분의 마지막 말이, 그녀의 마음을 또 한 번 꿰매주고 있었다.
그날, 카페를 나서며 채원은 생각했다.
‘나는 그분이 남긴 온기를 이어가고 있어.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거야.’
다음 날 아침, 채원은 병원에 조금 더 일찍 도착했다.
가방 안에는 박현정 씨의 마지막 편지가 들어 있었다.
짧지만 깊은 문장.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그 말이 밤새도록 채원의 마음을 울렸다.
병원 안은 아직 조용했다.
접수처 불도 꺼져 있고, 주사실도 텅 비어 있었다.
채원은 조심스럽게 편지를 꺼내, 작은 액자에 넣었다.
그리고 병원 복도 한쪽,
단골 환자들이 자주 지나가는 벽면에
그 액자를 걸었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잠시 뒤, 수경쌤이 출근하며 그 편지를 발견했다.
“채원쌤, 이거… 박현정 씨 편지예요?”
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남긴 마지막 말이에요.
우리 모두한테 해주고 싶었던 말 같아서요.”
그날, 박광식 할아버지도 그 편지를 읽었다.
“현정이… 참 따뜻한 사람이었지.”
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꼬마 간호사, 오래오래 있어줘요.
우리한테는 당신이 약보다 낫다니까.”
채원은 웃으며 대답했다.
“할아버지, 그 말… 현정 씨도 했었어요.”
그날 이후, 병원 복도에 걸린 그 편지는
누군가의 마음을 꿰매는 또 하나의 손길이 되었다.

어느 날 오후, 진료가 잠시 뜸해진 틈에 채원은 민지에게 말을 꺼냈다.
“민지쌤, 우리 병원 복도에 사진 하나 걸어볼까요?”
“사진이요?”
민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응. 단골 환자들이 웃고 있는 모습, 치료받고 나서 편안해진 얼굴들.
그런 순간들을 담아서 걸어두면… 병원 분위기도 조금 더 따뜻해질 것 같아서.”
민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좋아요! 저, 사진 찍는 거 좋아해요.
환자분들께 허락받고, 조심스럽게 찍어볼게요.”
그날부터 민지는 작은 카메라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박광식 할아버지가 드레싱을 마친 뒤 요구르트를 들고 웃는 모습,
수경쌤이 주사실에서 민지에게 장난치는 순간,
그리고 채원이 창가에서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
사진은 하나둘 모였고,
병원 복도 한쪽 벽에 조심스럽게 걸렸다.
“이거… 우리 병원 같지 않다.”
환자들이 지나가며 웃었다.
“여기, 내가 있네.”
박광식 할아버지는 자신의 사진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채원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작은 변화가, 누군가에게는 큰 위로가 될 수 있겠구나.’
그리고 병원은, 조금 더 따뜻해졌다.
사진 속 웃음처럼,
사람들의 마음도 조금 더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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