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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Jan 09. 2024

엄마의 팥죽

일상기록

팥을 유난히 좋아하는 엄마는 동짓날이 아닐 때에도 팥죽을 쑤실 때가 있다. 얼마 전에도 팥죽을 쑤기 위해 마트에서 팥을 사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밤, 퇴근한 나를 반기는 것은 식탁 위에 놓인 팥죽 한 그릇이었다.

엄마가 만든 팥죽을 홀랑 먹어버리느라 사진을 못 찍어서 인터넷에서 가져온 사진

나는 퇴근길에 시청역 승강장에 서서 엄마와 남편에게 '퇴근중'이라는 카톡을 보낸다. 시청에서 집까지는 약 한시간. 엄마는 내가 카톡 보낸 시간을 보고 도착할 시간을 어림하여 팥죽을 뎁히실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은 후 식탁에 앉아보면 내 앞에 놓인 팥죽에서는 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다.


나는 뜨거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염 때문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수시로 코에서 맑은 콧물이 나는데 뜨겁거나 매운 음식을 먹으면 거짓말 조금 보태어 식탁에 있는 휴지를 다 써야 할 정도로 콧물이 폭발한다. 그래서 나는 아주 편한 자리가 아니면 사람들과 뜨겁거나 매운 음식을 먹는 걸 피하는 편이고, 집에서도 가능하면 음식은 미지근하게 먹으려고 한다.


하지만 엄마의 팥죽에서는 늘 그랬듯이 오늘 밤에도 김이 솔솔 나고 있었다. 그릇을 만져보니 따끈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토 달거나 불평하는 일이 여간해서는 없지만 오늘밤은 괜히 심통이 나서 한 마디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입을 뾰로통하게 하고 엄마에게 말했다. "나 뜨거운 거 싫다고 했잖아"


엄마는 "이쯤이면 좀 식었을 텐데.."하더니 이어서 말했다. "딸 따뜻한 음식 먹이려고 그런다"


나는 거기에 더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가만히 팥죽을 떠먹었다. 먹어보니 엄마 말대로 적당히 식어서 먹기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 제법 뜨거웠을 팥죽이 이 정도 먹기 좋은 온도로 식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했을까. 그렇다면 엄마는 내가 '퇴근중'이라는 세 글자를 휴대폰에 찍어 보낸 후 얼마나 지나서 팥죽을 꺼내어 데우기 시작했을까. 내가 회사에서 계획성 있는 인간답게 '13시 10분에는 부산시에 전화를 하고, 13시 50분에는 과장님께 보고를 하고, 14시에는 화장실을 가고..'라는 식으로 일상을 분 단위로 나누어 사는 것처럼, 엄마도 혹시 '이쯤이면 전철을 갈아탔을 것이고, 이 정도면 전철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을 것이고..'하며 나의 귀갓길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적당히 따뜻한 팥죽에는 맛있으라고 뿌린 설탕과 계피가루도 살포시 잘 녹아들었다. 설탕과 계피가루를 휘휘 저은 후 달큰해진 팥죽을 떠먹으며 나는 팥죽 그릇이 꽤 오랫동안 따뜻하다고 느꼈다. 어쩌면 팥죽을 다 먹은 그 순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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