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을 유난히 좋아하는 엄마는 동짓날이 아닐 때에도 팥죽을 쑤실 때가 있다. 얼마 전에도 팥죽을 쑤기 위해 마트에서 팥을 사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밤, 퇴근한 나를 반기는 것은 식탁 위에 놓인 팥죽 한 그릇이었다.
엄마가 만든 팥죽을 홀랑 먹어버리느라 사진을 못 찍어서 인터넷에서 가져온 사진
나는 퇴근길에 시청역 승강장에 서서 엄마와 남편에게 '퇴근중'이라는 카톡을 보낸다. 시청에서 집까지는 약 한시간. 엄마는 내가 카톡 보낸 시간을 보고 도착할 시간을 어림하여 팥죽을 뎁히실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은 후 식탁에 앉아보면 내 앞에 놓인 팥죽에서는 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다.
나는 뜨거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염 때문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수시로 코에서 맑은 콧물이 나는데 뜨겁거나 매운 음식을 먹으면 거짓말 조금 보태어 식탁에 있는 휴지를 다 써야 할 정도로 콧물이 폭발한다. 그래서 나는 아주 편한 자리가 아니면 사람들과 뜨겁거나 매운 음식을 먹는 걸 피하는 편이고, 집에서도 가능하면 음식은 미지근하게 먹으려고 한다.
하지만 엄마의 팥죽에서는 늘 그랬듯이 오늘 밤에도 김이 솔솔 나고 있었다. 그릇을 만져보니 따끈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토 달거나 불평하는 일이 여간해서는 없지만 오늘밤은 괜히 심통이 나서 한 마디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입을 뾰로통하게 하고 엄마에게 말했다. "나 뜨거운 거 싫다고 했잖아"
엄마는 "이쯤이면 좀 식었을 텐데.."하더니 이어서 말했다. "딸 따뜻한 음식 먹이려고 그런다"
나는 거기에 더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가만히 팥죽을 떠먹었다. 먹어보니 엄마 말대로 적당히 식어서 먹기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 제법 뜨거웠을 팥죽이 이 정도 먹기 좋은 온도로 식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했을까. 그렇다면 엄마는 내가 '퇴근중'이라는 세 글자를 휴대폰에 찍어 보낸 후 얼마나 지나서 팥죽을 꺼내어 데우기 시작했을까. 내가 회사에서 계획성 있는 인간답게 '13시 10분에는 부산시에 전화를 하고, 13시 50분에는 과장님께 보고를 하고, 14시에는 화장실을 가고..'라는 식으로 일상을 분 단위로 나누어 사는 것처럼, 엄마도 혹시 '이쯤이면 전철을 갈아탔을 것이고, 이 정도면 전철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을 것이고..'하며 나의 귀갓길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적당히 따뜻한 팥죽에는 맛있으라고 뿌린 설탕과 계피가루도 살포시 잘 녹아들었다. 설탕과 계피가루를 휘휘 저은 후 달큰해진 팥죽을 떠먹으며 나는 팥죽 그릇이 꽤 오랫동안 따뜻하다고 느꼈다. 어쩌면 팥죽을 다 먹은 그 순간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