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고 그름 대신 감각을 선택하는 글쓰기
요즘 나는 글을 쓰는 데 시간이
참 오래 걸린다.
문장을 고치는 시간보다
내 안에서 자꾸 '정의'를 내리려는 태도로
글을 쓰는 모습 때문이다.
정의를 내리는 태도는
나를 불안에서 멈추게 하지만
감각은 닫히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질문도 멈춘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 걸까.'
'왜 글을 쓰고 있는 걸까.'
이 세상은 옳고 그름으로 가득하다.
하나의 상황에서도 서로 다른 기준들이
빠르게 정리된다.
나 역시 그중에서 나에게 와닿는
옳고 그름을 고르며 살아왔다.
대부분 그저 살아남기 위해,
다수에 속하기 위해
선택한 장치였다고 느껴진다.
함께 살기 위해,
충동을 줄이기 위해
불안을 낮추기 위해
만들어진 기준들.
그 태도는
사유의 흐름을 자주 멈추게 한다.
요즘 내가 느끼는
이런 위험함 들은
글을 쓰며 더 분명히 보였다.
더 이상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어지고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은
스스로는 편해질 수 있지만,
그 편안함은
나와 외부의 관계를 끊어내는 방식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정의'하는 태도를
해체해 보려고 한다.
판단은 미루고
선택지를 열어두고,
타인의 위치가 들어올
공간을 남겨두는 쪽으로
여기서 오는 불안감을 과연 나는
안고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덮쳐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옳고 그름은
악해서 생긴 게 아니라
불안을 견디기 어려워서
생기는 것이라면.
이 태도는
다정함과 친절에서
보완될 수 있지 않을까?
다정함과 친절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에게
감각으로 세상을 만나는
경험이 중요하듯
어른이 되어
세상을 만나던 감각을
닫고 학습으로 세상을 배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나만의 감각으로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상태로 살아가야 질문도 생겨나는 것이다.
나만의 의미를 찾아갈 수 있다.
그것이 세상적으로 보기엔
추상적이고 모호하여도
나를 그대로 인정하게 하고
동시에 여러 감정이 존재하여
흔들리고 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감각
다정함
친절
이 세 가지는 하나의 흐름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불리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감각은 의도가 없고
판단도 없도 목적도 없이 일어난다.
아직 그 누구에게도 향하지 않고
'나'에게 일어난 일에 가장 가까운 단어이다.
그래서 이 감각은 늘 취약하다.
아직 보호받지 못하고
아직 말도 되지 않았으니까.
다정함은 이런 감각을 지키려는 태도이다.
다정함은 감각자체가 아니라
내가 느끼는 그 감각을 밀어내지 않고
함부로 재단하여 고치려 하지 않으려는.
스스로에게 서두름을 주지 않는 마음이다.
친절은 그 다정함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나의 감각을 가진 채로
다른 사람을 다치지 않겠다는 행위
번역하지만 판단하지는 않는 방식의 행위.
'괜찮아'라고 말하지 않고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
해결책을 주지 않고
자리를 내어주는 것.
이것이 친절이라면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 게
나의 진짜 욕망은 친절함이다.
나에게 일어난 일을
타인에게 닿았을 때의 이름이다.
나는 이런 상태로 글을 쓰고 있었던가.
아니었다.
다시 나의 욕망으로 글을 써 내려가야겠다.
즉흥극을 함께하던 D친구가
내 작업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조금 위험한데?'
지나가는 말 처럼 드리지 않고
더 설명을 이어가려면 모습만 남기고
아무런 말을 이어가지 않았던
그 친구의 여백의 시간이 아직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