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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잊쑤 Nov 13. 2024

7월 : 2023년 여행, 혼자 가다 (3)

julio : 숙소를 잡아도 이런 곳에 잡냐?

생각과는 너무나 다르게 시작되는 여행이었다.


나는 분명 완벽하게 짜인 여행 계획표를 손에 들고, 여행을 시작할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여행 준비 첫날 예매한 야구장 티켓 하나만 손에 쥐고 있을 줄이야.

나는 분명 차근차근하고 꼼꼼하게 싼 완벽한 캐리어를 끌고 갈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여행 당일 새벽 허둥지둥 아무 옷이나 개어 넣고, 헬스장에 들고 다니던 목욕 바구니를 그대로 캐리어에 쑤셔 넣기 급급할 줄이야.


기차 안에서 MBTI 검사를 다시 해봐야겠다.


영등포 KTX 플랫폼에 도착했다.


적당한 파스텔 톤의 하늘에 적당한 퐁실함을 가진 뭉게구름들,

조금 넘치는 뜨거운 햇볕에 조금도 넘치지 않는 뜨거운 바람,

이 모든 것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8분 연착, 이 완벽한 여름을 즐기기에 적지도, 많지도 않은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나의 취향만으로 가득 채운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수원의 화창한 날씨는 나를 달달한 사랑 노래 속 주인공으로 만들었고,

비 내리는 대전에서는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륵 흘리는 이별 노래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여러 감정들 속을 이리저리 헤매었다.


'기차'라는 공간이 주는 특별함 때문에? 아니면 창밖의 다채로운 풍경들 때문에?

아니면 내 취향 가득한 음악들 때문에? 아니면 이 모든 요소들이 한꺼번에 나의 마음을 강타해서?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나를 이번만큼은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작은 요소 하나로도 쉽게 감정에 휘둘리는 나를 스스로 나약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이 나약함이 꼭 부끄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이렇게 감성에 취해 여행의 순간순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니까.


드디어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나의 코와 입을 막아오는 덥고 무거운 공기에 깜짝 놀랐다. 실제로는 이렇게까지 덥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저렇게까지 덥다고 느낀 것은 '대구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더운 곳'이라는 말을 어려서부터 들으며 자라서일지도 모른다.

아무렴 어떤가. 지금 내가 대구에 왔다는 것만이 중요하지.

동대구역

지하철을 타고 호텔이 있는 반월당역에 도착했다.

내가 누구인가! 학창 시절부터 부평의 복잡한 지하상가를 돌아다니던 여자 아니던가. 웬만한 지하도는 헤매지 않고 잘 다닐 수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곳은 대구이니까... 대구는 경상도이니까. 약간 헤맬 수 있지.

출구를 잘못 찾아서 나오는 바람에 역에서 호텔까지 걸어서 3분인 거리를 10분이 넘게 걸어갔다.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을 적어내기 위해선 약간의 스포일러가 필요하다.

9월 챕터에서는 '노량진 공무원 기숙학원'을 다닌 이야기를 한다. 앞서 얘기한 대구에 사는 언니도 이 기숙학원에서 만난 친해진 언니었다.

언니에게 내가 예약한 숙소에 대해 물어봤을 때,

"오, 호텔에 도착하면 네가 대구에 온 것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익숙할걸?"이라 했다.

그 당시엔 무슨 말인지 의아했다. 하지만 동성로에 발을 딛자마자 언니의 말을 십분 백분 천분 이해했다. 어디를 보나 공무원 학원이 눈에 들어오는 이 풍경, 너무나도 익숙하다.


이번 여행 중에 고민거리로 챙겨 온 것 중 하나가 '계속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것인가?'이었는데,

공무원 학원으로 둘러싸인 곳에 숙소를 잡다니,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


어처구니없음 나의 배고픔을 잊게 만들지는 못했다.


호텔 프런트에 캐리어를 맡기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기차에서 뭘 먹을지 검색하지 않고 뮤직비디오의 주인공 역에 심취했기 때문에 대구에서의 첫끼는 익숙한 '버거킹 치즈와퍼주니어 세트'를 먹기로 했다. 대구의 버거킹도 맛이 똑같았다. 프랜차이즈니까 너무 당연한 말이었겠지만, 그 익숙한 맛이 혼자 타지에 와있어 가지는 약간의 긴장을 조금은 풀어지게 만들었다. 

버거킹 치즈와퍼 주니어 세트

체크인 시간이 되기 전까지 동성로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고개를 내리면 바닥에는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는 수많은 공무원 학원 전단지들이 보이고,

고개를 들면 눈을 어디에 두어도 보이는 공무원 학원 간판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동성로에 있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노량진 거리가 겹쳐 보인다.

며칠 전만 해도 이런 정경에 서있는 나는,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걸어가기 바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정해진 목적지 없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낯설면서도 여유로웠고, 너무나도 불안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

우산이 없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런 정경의 한복판에 서 있는 지금의 나는, 젖을까 봐 옷으로 감싸야하는 가방도, 책도 없다.

그저 한없이 비를 맞아도 되고, 아니면 나의 머리를 감싸도 되는 지금의 상황이 나를, 모르겠다. 

서러운 것일까, 비참한 것일까, 불안한 것일까, 한심한 것일까, 안쓰러운 것일까,

그냥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어떠한 감정이었다. 


울어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래되었다.

지금의 나의 상황이라면 울어도 마땅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정말 길 한복판에서 울면 인터넷에 대문짝만 하게 나올 수도 있기에,

서둘러 호텔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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