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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의취향과 윤글 Mar 17. 2016

환절기(換節期)

하필 환절기였다. 그래서 더 아팠다.



언젠가 꾸었던 꿈에서 우리는 이별을 했었다. 깨고 나서 장소가 어딘지는 기억할 수 없었지만, 그 계절의 감각은 한참동안 생생했고,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분명 겨울과 봄 사이 어디쯤, 말하자면 환절기였다. 꿈 속에서 하루는 분명히 함께 따뜻한 봄을 거닐었지만 바로 다음 날엔 칼바람이 불어 겨울 같았다. 그 날, 그의 눈빛과 손길이 그만 차가워지고 말았었다. 그렇게 그의 뒷모습이 아득해지는 것을 보다가 꿈을 깼었다.


이 꿈을 그에게 얘기했을 때,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다독여주던 그의 손길은 확연한 봄이었는데.


꿈이 딱 맞았다. 하필, 꿈에서 봤던 시린 눈빛과 손길을 마지막으로 하고 나로부터, 우리로부터 아득하게 멀어져버렸다. 나는 그의 너른 등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필이면 꿈과 딱 맞았다.


그 날 이후, 나는 계속 같은 꿈을 꾼다. 현실이 되어버린 그 꿈을, 그가 돌아오는 기적이 없으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그 꿈을. 깨고 나면 나사가 몇 개 빠진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버텨야 한다. 그렇게 죽어간다. 내가 끝내 살아내야 하는 생시가 꿈보다 조금 더 참혹하다.


그가 좋아하던 가수, 검정치마의 노래를 종일 틀어놓으면 'You are my everything' 하는 부분에서 그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그가 그 다디단 가사를 불러주는 착각이 들면 그대로 두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하루 종일 그와 비슷한 인상착의만 봐도 울어버렸고, 또 어느 날에는 그만 찾아다니며 거리를 방황했다. 길을 걷다 그와 비슷한 체형, 얼굴, 키를 가진 사람이면 꼭 한 번은 잡고 봤다. 비가 오면 아무데도 가지 않고 뭘 먹지도, 심지어 화장실도 한 번 가지 않았다. 그저 하루 종일 창문 앞에 딱 붙어 앉아서 빗물이 떨어질 때마다 별똥별이라 생각하고 그가 돌아오길 한참동안 기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이런 것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보살핌을 받지 못한 몸은 점점 아파졌다. 쇠약해진다는 단어가 딱 맞았다. 잠을 자는 것도 힘들어 밤을 새기 일쑤였고, 식욕은 바닥을 치다 못해 지하로 꺼져버렸다. 어디에 살짝 닿기만 해도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하루종일 구토가 치밀어 수시로 헛구역질을 했고, 맨땅에서도 멀미를 했다. 뭘 먹을 생각도 없고 구토 때문에 먹지도 못하니, 살은 계속 빠졌다. 병원을 제 집인 양 드나들었다. 집 안 곳곳에는 처방받은 약과 수면제, 아버지께서 가져다주신 민간요법 책과 보약들까지 여기저기에 널부러져 있었다. 누구보다 튼튼하다고 자신하던 나는 이제 없었다.


그렇게 여느 사람들과 같이 이별의 수순을 밟고 있지만 인정하지 않으며 발악하듯 지냈다. 돌아올 거라고 믿으면서. 그의 부재를, 그 존재의 부재를 항상 느끼고 있지만 애써 외면했다. 목 뒤로 부재를 삼켰다. 억지로 집어삼킨 부재는 위벽에 들러붙어 꼭 염증을 일으키곤 했다.


사람 하나를 마음에서 떼어내는 일이, 사랑 하나를 마음에서 지워내는 일이, 한 사람의 일상을 이토록 피폐해지게 만든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책에서도 어느 매체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쉽게 접할 수 있고, 실제로도 숱한 이별들을 겪어왔다. 그러나 이번엔 너무 다르다. 너무 심하게 아픈 것 같다. 스스로 유난스럽다 싶을 정도로, 이 고통을 대체 뭐라 설명해야 될지 모를 정도로.


매일 계속되는 이 고통 속에서 그가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 깨달았다. 이제야 온전히 깨달았다. 폐부 가득 들어찬 후회를 목 뒤로 삼킬 수밖에 없는 상황은 나로 하여금 진득한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그가 보낸 마지막 문자를 아직 읽지 않았다. 그걸 읽고 그 시린 의미를 단번에 이해할 내가 싫어서. 읽고 답장했을 때 다시 오지 않을 재답장의 공백이 너무 클 것 같아서. 항상 떠있는 알림 때문에 메시지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있지만 끝내 확인하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눈 뒤쪽이 아팠다. 눈물을 억지로 삼키는 날이 많아서. 내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가 뭔지 잘 알고 있어서. 얼굴 안 쪽에 염분이 들어찼다. 내 얼굴을 들어내면 안에서 꼭 바다냄새가 날 것만 같았다.


나는 밤이 유난스럽게 긴 이 지독한 환절기를 살아내야만 한다는 것과, 새로운 계절이 완연해지기 전까지는 마음의 일교차를 스스로 견뎌내야만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뭘 알고 있어도 소용없었다. 아무도 만나기 싫었다. 절기가 바뀔 때마다 수순을 밟듯 겪는 관계의 권태로움이 아니라 그냥 그가 아니면 그 누구도 싫었다. 나를 아는 사람은 제발 마주치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을 피했다. 근처에 도사리는 지인들의 예리한 눈빛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정말 어쩔 수 없이 일이 생겨 나왔고 또 하필, 그들을 마주치고야 말았다. 나를 알고 그를 아는, 우리 사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오, 안녕.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그들은 나를 보고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다는 둥, 예뻐졌다는 둥의 가벼운 안부를 물으며 혹시 좋은 일이 있는 거냐고 활짝 웃으며 물었다.


'하하, 좋은 일?'


그저 안부 인사임을 알면서도 내 표정이 급속히 굳어지고 말았다. 그새 그들의 눈빛이 바뀌었고 몇몇은 벌써 서로 눈치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한 명이 나서서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면, 무슨 일 있어?"


내가 표정관리를 잘못한 탓인가 싶어 괜히 미안해졌다. 나 자신에게 이 정도도 숨기지 못하는 거냐고 짜증내고 싶었다. 아, 이래서 나오기 싫었던 건데. 그들에게 다른 악의가 없음을 알고 있지만서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고, 다른 걸 다 떠나서 너무 피곤했다. 얼른 일을 끝내고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나는 일일이 반응할 힘도 없어 그냥 조용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냐, 그냥 좀 피곤해서. 근데 나 지금 일이 있어서 가야 하는데..."


그들은 내 얘기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나를 앞에 세워두고 자기들끼리 쫑알댔다. 나도 그런 그들을 두고 딴 생각을, 언제나 하던 그의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남은 사람이 나와 그 사람뿐이면 좋겠다. 그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니까. 나처럼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니까, 이 세상에 둘 뿐이면 외로워서라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돌아왔으면 좋겠다.'


바쁘고 피곤한 와중에도, 사람들이 앞에서 북적이고 있는데도, 이런 생각을 곧잘 할 수 있게 되어버린 것도 이젠 대수롭지 않은 일상이었다.


한껏 수군대던 그들은 내 멍한 표정을 발견하곤 입을 꾹 닫았다. 그들은 슬그머니 나를 에워쌌고, 그들 중 한 명이 내 팔을 붙들었다. 그리곤 무슨 말이라도 좀 해보라며 눈빛으로 닦달했다.


"저기, 나 지금 진짜 가야 하는데."


사실 그리 바쁘지 않았지만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섣부르게 답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답하든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온갖 추측에 상당히 동의하는 모양새가 될 것 같았다. 그들 앞에서 인정할 수 없었다. 아직 나는 끝이 아니었다. 꼴에 같잖은 자존심도 발동했다. 내 얘기를 듣고 그들이 건네줄 그 어떤 위로도, 동정도 전부 다 싫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괜찮아. 나 진짜 아무 일 없어."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계속 나를 보며 다 불어보라고 재촉하는 눈빛에 이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너희가 알아서 뭐 어쩔 거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입 꼬리를 최대한 많이 끌어올려 웃어보였다. 애꿎은 사람들에게까지 화풀이를 할 만큼 못난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진짜 괜찮아?"


"응, 괜찮아."


입꼬리에 자잘한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젠장, 제발 아무 것도 묻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았다.


“괜찮긴, 네 표정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이야? 헤어졌어?”


숨이 턱 막혔다. 말 그대로 숨이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경련이 일던 얼굴 근육들이 이젠 모조리 다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표정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서 자칫하면 그 자리에서 물풍선을 터뜨리듯 뻥하고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당장 이 사람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미친년처럼 울어버리고 싶었다. 마인드컨트롤, 참을 인 같은 것들을 되뇌는 것보다 그게 더 쉬울 것 같았다.


"아냐. 그러니까 이것 좀 놔 줄래?"


더 이상의 질문은 듣고 싶지 않았다. 발버둥치듯 그들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내 팔을 붙들고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우리 잠깐만 얘기 좀 하자."


그들의 눈빛은 마치 사냥감을 포착한 사냥개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일종의 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몸이 떨렸다. 몇몇은 내가 도망갈까 붙들고 있었다. 한 명이 휴대폰을 보며 알 수 없는 약간의 미소를 짓더니 옆 사람에게 귓속말을 했다.


"헤어졌구나?"


고개를 떨궜다. 몸이 계속 떨렸다. 기어이 그에게 확인했구나. 이제 그는 아무에게나 우리의 단절을 말하고 다닐 만큼 무심해졌구나. 눈에 뜨거운 것들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를 악물었다. 참아야만 한다.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이윽고 나의 이곳저곳 물어뜯을 채비를 했다. 번뜩이는 이빨이 보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두려움으로 둘둘 말린 나는 그들 앞에서 한낱 먹이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피부조직은 그들의 이빨이 닫기도 전에 이미 궤사되고 있었지만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왜? 뭐 때문에? 네가 먼저 말했어? 아니면 차인 거야? 뭐라고 하던데? 말 좀 해 봐, 얼른. 답답해! 궁금해 죽겠네!”


아, 긴가민가했으나 이쯤 되니 확실해졌다. 이들이 물은 건 안부가 아니다. 이들이 궁금한 건 내 안위가 아니다. 위로를 위한 물음도 아니고, 나는 여기서 그냥 잠깐 흥미로운 가십거리일 뿐이다.


"뭐하는 짓들이야 지금."


화를 낼 기운이 없었지만 끓는 분노를 숨길 수 없었다. 참을 수 없었다. 이대로 더 물어뜯기고 있을 수 없었다. 남은 힘을 다해 눈을 치켜뜨고 그들 하나하나를 째려봤다. 그제야 그들은 기가 눌린 사냥개처럼 낑낑대는 소리를 내며, 드러냈던 이빨을 도로 숨겼다. 먼저 이성을 차린 한 명이 상황을 다시 수습하기 시작했다.


"미안해. 그게 아니고..."


"나 갈게."


입술을 꾹 깨문 채로 그들 사이를 헤쳐 나왔다. 그들은 나를 잡지 않았고, 나는 더 이상 그들 앞에서 죽어가고 싶지 않았다. 진작 뿌리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몸이 너무 떨렸다. 못 견디게 추운 겨울 바람이 나를 날카롭게 훑었다.


그들의 취조에 묵비권을 행사한 건 잘못된 선택일지도 모른다. 미안하다고 했지만 지금 당장부터 그들과 그들 주변에 어떤 소문이 퍼질지 안 봐도 뻔했다. 정성껏 답하기 싫었고, 그럴 정신도 없었다. 그들은 내 무너짐을 친절하게 다 받아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애초에 내 대답에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추스를 곳이 필요했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도달하려 부지런히 걸어야만 했다.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꽉 쥔 채 걷는 일은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울음까지 참아야 했으니 더욱 그랬다.


나도 모르게 집 앞으로 돌아왔다. 확실히 그들에게서 충분히 멀어졌다. 하지만  다리는 후들거렸고 몸은 계속 떨렸다. 진정하려면 심호흡을 해야 했지만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벌개진 얼굴이 곧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새 입술이 다 터져 입 안에 피냄새가 진동했고, 꽉 쥔 주먹 탓에 손바닥에는 손톱이 파고든 자국 위로 피가 새어나왔다.


"이게 뭐냐, 진짜로 물어뜯긴 것 같잖아."


피묻은 실소가 비리게 새어나왔다.


그들은 나를 죽였다. 우리를 죽였다. 그제야 실감했다. ‘헤어짐’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우리가 아님을. 그 사람의 부재를. 내가 견뎌내야 할 아픔을. 그제야 다 실감했다. 부정하던 것들이 그제야 폭풍처럼 몰아닥쳤다. 여태 아팠던 것보다 훨씬 더 아팠다. 꽉 쥔 주먹으로 심장 근처를, 가슴 언저리를 퍽퍽 내리쳤다. 숨을 쉬든, 죽어버리든 둘 중 하나를 꼭 해야만 했다.


나는 그렇게 대문 앞에서 한참동안 가슴을 내리치다 정신을 잃었다.









윤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첫 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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