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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라는 사치

운전하면서 음악은 언제 들을 수 있게 되는가

by 김슬기 Mar 11. 2025

때는 4년 전쯤. 고등학교 동창 여섯 명이 만나던 날. 영등포구에 사는 A가 동작구까지 차를 몰고 왔다. 그때는 서울 한복판을 초보운전이 가로질러 온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 일인지 몰랐기에, '그러려니' 했다. 맛있는 밥과 차까지 든든히 먹은 뒤 집으로 돌아갈 시간. A가 당시 마포구와 종로구에 사는 나와 B에게 카풀을 제안했다. 단, 자신이 갈 수 있는 길이 정해져 있다며 반드시 '공덕역'에 내려야 한다는 제약 조건과 함께. 우리는 마다하지 않았다. 복잡한 대중교통에 몸을 맡기는 것보단 자가용이 분명 나을 테고, 또 가는 길에 수다를 떨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함께.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알고 보니 A는 운전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왕왕왕' 초보운전이었고, 바짝 얼어붙은 채 핸들을 두 손으로 꽉 쥐고 있었다. 누군가는 우회전을 운전 중 가장 어려운 것으로 꼽기도 했지만, 왕왕왕 초보 시절의 A는 우회전을 참 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회전, 우회전, 또 우회전. 우리는 자꾸 오른쪽으로만 돌았다. 그 덕분에 A는 우리의 약속 장소였던 친구 C의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지 못한 채 자꾸만 빙빙 돌았다. 불법주차 된 좁은 도로 사이를 아슬하게 몇 번이고 지나갔다. 운전을 전혀 할 줄 모르던 시절의 나였지만, 어쩐지 입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B가 해맑은 목소리로, 식은땀을 흘리는 A를 향해 외쳤다.


"BTS 노래 들어도 돼?"

 

B는 BTS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BTS의 팬들의 수를 하나라도 더 늘리기 위해, 아낌없이 전도(?) 활동을 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다 못해, 앞유리창을 뚫고 나갈 것 같이 바짝 긴장한 A가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안돼! 노래 절대 안 돼!"


이수역에서 공덕역으로 가는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셋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공덕역에 다 와서는 창문으로 뛰어내렸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A가 아이의 엄마가 되고, 그 아이를 위한 카시트를 얹고 척척 운전하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는 시간이 되어서야, 나도 드디어 운전대를 잡았다. 희미해져 가던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BTS 노래를 틀지 말아야 한다고 절규하듯 소리치던 A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왜 그랬는지 그제야 이해가 됐다. 뻣뻣한 긴장과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한 차 안에서 나는 그 모든 걸 노곤하게 녹여줄 음악이라는 사치를 결코 누릴 수 없었다.


일단 정글 같은 도로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몸의 감각이 한껏 예민해져 있다. 신호등과 앞뒤양옆의 차들과 보행자들의 정보가 시시각각 다른 모양으로 물밀듯이 쏟아진다. 시각 정보는 이미 포화 상태다. 핸들을 기울이는 각도, 사이드 미러를 보는 타이밍, 브레이크나 액셀에 발을 가져다 대는 것과 적절히 누르는 감도까지. 기본적인 자동차 조작 능력도 몸에 배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하나 생각해서 조합을 하느라 뇌가 터질 것 같다. 입력뿐만 아니라 적절한 출력까지 해내야 하는, 어쩌면 운전은 과장을 보태 오케스트라 합주 같은 것이 아닐까. (물론 자동차 조작 능력에 익숙해지면 이 모든 것들이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의 첫 운전을 떠올려 보길. 도대체 핸들을 얼마나 돌려야 오른쪽으로 '적절히' 나아갈 수 있는지를 처음부터 알았던가. 반바퀴, 한 바퀴, 한 바퀴 반... 공식처럼 외워보고 또 엉망으로 돌리고 또 돌리던 그 시간들을!)


음악이 사치인 또 다른 숨겨진 이유도 있었다. 겁이 많은 나는 끔찍한 장면을 굉장히 생생하게 상상하는 저주받은 재능이 있다. 100퍼센트 나의 과오로 사고를 이리 쿵, 저리 쿵 박으며 내는 그런 류의 상상들을.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결국엔 '운전미숙'으로 사고를 낸 주제에 여유롭게 지드래곤이나 유명 아이돌의 신나는 댄스 음악을 듣고 있었다는 사실에 손가락질받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내가 내 차에서 노래를 듣겠다는데 뭐 어쩌라고' 식의 태도와 말들은 억지로 꾸며내 만들지 않은 이상, 내 뇌의 기본 소프트웨어에는 설치되지 않은 어떤 것이다. 대신 경거망동하지 않으면 반은 간다는 내 안에 오래 뿌리내린 태도가 나를 붙든다. 그러니 음악 따위 켜지 않는 게 좋겠다고.


대신 스마트폰 음악앱에 운전용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하나씩 쌓아갔다. 길을 걷다가도 들려오는 좋은 노래를 찾아내 그 리스트에 추가하다 보면, 언젠간 여유롭고도 멋지게 노래를 들으며 운전할 날이 오겠지 꿈을 꿨더랬다. 프로 예민러 왕초보 운전자의 귀에 거슬리지 않으면서, 결코 경거망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런 꽤 감각적인 노래들을 엄선했다. 댄스, 힙합, 락을 좋아하는 평소의 취향과는 분명 다르지만, 운전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너무도 사랑하게 될 것 같은 그런 노래들을 골라 담기 위해 애썼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초보운전자의 시간도 흐른다. 그리고 나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블루투스로 스마트폰 음악 앱과 차량용 스피커를 연결시켰다. 그렇게 처음 재생하게 된 나의 첫 번째 사치는 어떤 곡이었나. 한 땀 한 땀 모으던 운전용 플레이리스트? 아니다. 그 음악들은 1순위에서 밀려나다 못해 10순위쯤 되었을 거다. 차 안에서 울려 퍼진 건 평소엔 절대 듣지 않던 클래식이었다. 아무래도 가사가 있는 음악은 들을 자신이 없었다. 운전 한 달 차가 다 되어가는 때였을 건데, 그 어떤 소음, 잡음, 대화도 불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클래식은 평정심을 찾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운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클래식 모음' 플레이리스트가 재생되고, 우아한 선율이 운전석과 동승석 문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희미하게 퍼져 나왔다. 실은 긴장한 탓에 운전을 하는 동안엔 음악이 재생되고 있다는 걸 잊을 정도였다. 작고 희미하게, 그러나 우아함을 잃지 않고 퍼져 나왔을 클래식. 직진을 해야 하는데, 좌회전 전용 차선으로 접어들어 오도 가도 못한 채 신호를 기다리는 나는 눈물을 머금으며 생각했다. 


'언젠가는 운전도 클래식처럼 내 삶에 있는 듯 없는 듯 스며드는 날이 찾아오겠지.'



에필로그: 홍크홍크 힛 더 클락션

여름휴가철이었고, 동생과 반려견 우주 셋이서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반려견 동반 수영장을 향해 가족이 나름의 작은 휴가를 떠나는 길이었고, 신이 났다. 최신 아이돌 노래들을 랜덤 재생하며 조금은 자신감이 차올랐던 그때. 저 먼 곳에서 '빵빵' 하는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초보운전자들의 특징 중 하나는, 나와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경적 소리마저 나를 향한 것이라고 착각한다는 것. 나는 사이드미러와 룸미러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며 눈치를 보기 바빴다. 내가 뭘 또 잘못 한 건 아닌지, 마음속으로 또 '뭘 잘못했는진 모르지만 일단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또다시 들려온 '빵빵' 하는 희미한 소리. 나는 음악 볼륨을 한껏 낮췄다. 신나고 가볍게 여름휴가를 떠나는 차 안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이어졌다. 역시 음악이라는 사치를 부리기엔 여전히 부족한 것일까. 경거망동을 하면 안 되겠다 생각하던 때, 재생되고 있는 음악의 곡명을 보게 되었다. '(여자)아이들'의 2024년 7월 발매곡, <클락션>이었다. 상큼 발랄한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 뒤로, 빵빵하는 귀여운 효과음이 더해진 그런 신나는 여름 노래.

"우 우아우 우 우아우, 홍크 홍크 힛 더 클락션!"

나는 초보운전 딱지를 완전히 떼어 낼 때까지 <클락션>은 자체 운전 금지곡으로 지정해 두었다. 신나는 비트에 궁둥이를 씰룩이는 신나는 마음이 되었다가도, 희미하게 들려오는 경적 효과음 때문에 바짝 긴장한 채 망을 보는 미어캣처럼 되는, 나는 초보운전이니까. 

(그런데 이 노래 신나긴 신난다. 홍크 홍크 힛 더 클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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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이미지 생성도구 DALL-E로 상상력을 더해 제작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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