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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암사자 Dec 29. 2022

[소설] <우럭 장례식> 1. 입주 계약서


세상이 파란 새벽으로 물들고 나서야, 뒤늦은 어둠이 찾아드는 지하의 작은 노래 주점이 범주의 일터였다. 예정된 퇴근 시간을 30분 넘긴 시간, 범주는 카운터 뒤쪽의 분전함을 열어 외부 간판등과 실내 조명, 노래반주 기계의 전원 스위치를 차례로 껐다. 밤새 밝았던 것들이 순식간에 제 몸을 감추듯 어두워졌다. 카운터 바로 옆 주류 냉장고에서만 파랗고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범주는 마음이 급해 눈이 어둠에 채 적응하지 않았는데도 빠르게 걸어갔다. 발에 무언가 걸려 통통 소리를 내며 뒹구는 소리가 났다. 그는 바닥에 주저 앉아 손을 더듬거렸다. 빈 맥주 페트병이었다. 한 쪽에 대충 세워두고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퇴근하고 서너 시간만 눈을 붙였다가, 이른 아침부터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이사 갈 집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범주는 ‘오피스텔 매물 최다 보유’, ‘우리 가족의 집을 구하는 마음으로’ 같은 현수막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백억 부동산’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부동산 내부 벽면에는 이미 재개발이 완료된 지역도 포함된 낡고 빛바랜 지도가 붙어 있었다. 그 지도가 새로 붙여질 즈음엔, 한창 젊었을 나이든 공인중개사가 범주를 맞이했다. 공인중개사는 이를 스무개쯤 드러내며 웃는 사람이었는데, 중개수수료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비싼 집을 소개할 때엔 이가 더 드러나 양쪽 어금니를 대신한 금이 반짝였다. 


“밤에 일하고 낮에 자야해서 방음만 잘 되면 됩니다. 다른 건 필요없어요.”


공인중개사의 드러난 웃음이 더 반짝였다. 그는 H 오피스텔을 추천했다. 월세는 조금 비싸지만, 여유가 있다면 이 오피스텔이 최고라고 했다. 그 말은 믿을 만 했다. 공인중개사가 대표 한 명 뿐인 백억부동산의 대표는 매주 일요일이면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부동산 일을 하며 수많은 회개를 해야 했는데, 자식들 다 키워 결혼까지 시키고 난 나이 쯤 되니, 회개 하는 일도 여간 귀찮고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요즘의 그는 회개 할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아, 최소 고객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때에 따라 진실을 굳이 말하지 않은 적은 있어도 입 밖으로 내뱉은 거짓은 없었다. 그가 믿는 신에게 맹세할 수 있었다.  


공인중개사는 서둘러 차 키를 챙기더니, ‘직접 보시는 것 만큼 좋은 게 없다’며 범주와 H오피스텔로 향했다. 차는 시동을 켜고 목적지에 도착해 시동을 끄기까지 도합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마저도 골목길 주차가 어려워서 그만큼 소요된 것이지, 걸어가도 3분이면 도착할 수 있을 법한 가까운 거리였다. 공인중개사는 그리 덥지 않은 날씨에도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으며 말했다. 


“요즘 층간 소음이 문제잖아요. 제가 이 동네에서만 30년 부동산 일을 했잖아. 이 건물이 이 일대에선 제일 두꺼운 벽으로 시공했을 거예요. 필요 이상으로 그렇게 한 거지. 손님 원하시는 방음 하나는 끝내주는 거예요. 게다가 대부분이 회사원이 대학생들이 살아서 낮에는 쥐 죽은듯이 조용-해요.” 


공인중개사는 특히 ‘조용’이란 단어를 말 할 때, 부러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소리보다는 공기가 8할은 되는 것 같은 간지러운 소리였다. 


“제가 중개한 집들이요. 하나같이 평이 좋아요. 어떤 고객님들은 굳이굳이, 부동산에 들러가지고, 안 받겠다고 하는데도 비타500 한 박스를 던지듯이 놓고 가셨잖아요. 비타500 들고 밖에 금방 따라 나갔는데도, 고객님이 벌써 어디가고 안계신거 있죠. 호호호.”


그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늘어 놓았다. 범주는 공인중개사의 말을 뒤통수로 들으며, 오피스텔 곳곳을 살폈다. 지은지 얼마되지 않은 건물이어서 깨끗한 인상을 줬다. 범주가 보고 있는 1609호는 남향이었다. 집 안에 한 낮의 빛이 잘 드는 것은 범주에겐 단점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공인중개사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거 보세요, 남향이라 햇빛도 아주 잘듭니다’하고 속없이 웃고 있었다. 


범주는 집 구하는 데 너무 많은 힘을 빼기 싫어, 며칠 뒤 백억 부동산을 찾아 H 오피스텔 입주 계약서를 썼다. 집주인과 공인중개사, 범주가 나란히 앉았다. ‘이 집이 천국이 되게 하소서’ 캔버스 액자가 그들 머리 위에 걸려 있었다. 


천국이 되지 못한 것은 명확한 지옥이 되었다. 범주가 H 오피스텔에 이사온 지 정확히 176일 째 되던, 월요일 아침이었다.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암사자입니다. :-)

2022년 여름에 완성한 장편 소설 <우럭 장례식>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4화까지는 브런치와 포스타입 두 곳에서 무료로 연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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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당 200원으로 유료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완결까지 읽어도 커피 한 잔값! ㅠㅠ!!)

차곡차곡 구독료로 받은 돈은, 

2023년 '암사자북스'를 통해 발간 예정인 <우럭 장례식>의 종이책을 만드는 인쇄비에 보태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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