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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암사자 Dec 30. 2022

[소설] <우럭 장례식> 3.제안

1604호 앞에 서서 범주는 골똘히 생각했다. 같은 층에만 12세대가 넘는 집이 살고 있는데, 왜 개의 짖음은 진압되지 않는가. 반려동물을 많이 키우게 되면서, 사회의 관대함과 포용력이 이토록 늘어나게 된 것일까. 층간 소음 때문에 서로의 문에 포스트잇이 붙고, 엘리베이터에 휘갈겨 쓴 위협적인 메모들이 붙는다던데, 왜 이 오피스텔은 개 소리를 두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은 걸까. 범주는 중국집 전단 하나 붙은 것 없는 1604호의 문 앞을 서성이다, 붙였다 떼어진 메모라도 찾을 요량으로 바닥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개 이름이 초코라는 것을 안 것이 유일한 소득인 범주는, 슬리퍼를 끌듯이 걸으며 1604호에서 멀어져 갔다. 


엘리베이터는 16층까지 금세 도착했다. 올라온 것을 타고, 범주는 1층 야외 흡연구역으로 나섰다. 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좀전까지만 해도 풀빵만하게 느껴지던 혹이 찜빵처럼 크게 부푼 것 같다. 


‘개새끼’


짖는 개가 직접 자신의 머리를 가격한 것도 아닌데, 범주는 개 탓을 했다. 그는 연달아 두 개피의 담배를 태웠다. 담배 때문인지, 들리지 않는 개 소리 때문인지 그의 마음에 작은 평화가 피어 올랐다. 이불이 깔린 자신의 집보다, 야외 벤치가 훨씬 더 아늑하게 느껴진다. 이곳에 앉아 있다가 범주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꾸벅하고 존다. 그러다 넘어질 듯 한 번 크게 휘청이며 졸았는데, 범주는 모든 걸 잠시 내려놓고 이 벤치에서 한 숨 푹 자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벤치 위의 등받이로 몸을 바짝 당기고, 슬리퍼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둔다. 눕기 직전, 주위 눈치를 잠시 살피는데 오피스텔 입구 쪽에서 노란 머리의 남자가 걸어오는 것을 발견한다. 1602호였다. 범주는 누운 그 자리에서 그를 바라본다. 


민기는 흡연구역에 들어서자마자, 불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먼저 물었다. 그러곤 무언가 잃어버린 사람처럼 허둥대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자신의 트레이닝 바지의 주머니를 뒤집어 뺐고, 더듬거리며 온 다리를 훑더니, 튀어 나온 무릎 부분까지 의미없이 두드리기까지 했다. 그런 다음엔 흡연구역 옆의 화단 근처를 두리번거리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소득이 없던 그는 물었던 담배를 다시 손에 들고, 바닥 블록 사이에 난 애먼 잡초를 발로 짓이겼다. 


범주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끙, 하고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다가가 라이터를 내밀었다. 민기는 성가신 잡초만 잔뜩 보이던 자신의 눈에 나타난 라이터가, 하필 지포 라이터라는 것이 낯설었다. 낯설지만 친근하고 반가웠다. 라이터는 라이터였다. 무심결에 손에 받아들고, 고개를 들어 고맙다고 말하려는데, 그는 라이터 내민 손 아래로 보인 범주의 슬리퍼를 알아봤다. 슬리퍼 아래로 커다란 발가락이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요란스럽게 꼼지락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까만 다리를 갖고 있는 그의 발목엔, 한자로 된 타투 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민기는 그 한자가 무엇인지 알 듯 말 듯 했다. 민기는 진심으로 고맙지 않은데도, 감사합니다, 하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 말 대신, ‘어!’ 하는 애매한 소리를 내며 멋쩍게 웃어버렸다. 불붙은 담배에서 연기가 피어 올랐고, 라이터를 돌려 받은 범주도 ‘팅-’ 하는 명쾌한 소리를 내며 불을 붙여 담배 한 개피를 더 태우기 시작했다.


“개 이름이, 초코?”

“옆집 사는 개주인이 그렇게 부르는 것 같더라고요.”


민기는 범주의 애매한 반말이 거슬렸지만, 굳이 그것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진 않았다. 


“이 시간이면, 한창 자야 할 시간인데.”

“아… 네.”

“학생?”

“네, T대학요.”

“명문대 다니네. 지금, 벌써 방학인가?”

“아뇨. 아직 5월인데…”

“아, 5월이면, 여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니니까. 방학이 아니지.”

“……”

“거기 다니려면, 수능 몇 점은 되야하나?”

“글쎄요. 과마다 천차만별이라. 의대는 당연히 높고. 또 비교적 낮은 점수로 들어올 수 있는 학과도 있고요.”

“대학 가까운 데서 계속 일하다 보니까, 그 앞을 출근 할 때나 퇴근 할 때나 마트 갈 때나 그 앞을 자주 왔다갔다 하게 되잖아. 벌써 십년도 넘게 그러고 있는 건데. 아마 거기 졸업한 애들보다 더 자주 대학 정문 앞을 얼쩡거렸을걸. 그러다보니, 어떤 때엔 막 착각도 해. 나도 공부하면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근데 웃긴게 뭔지 알아? 고등학교도 공부하기 싫어서 안마치고 나왔어. 남들 다 졸업하고 나오는 데를. 그래놓고 남들 아무리 노력해도 가기 힘들다는 명문대를 올만하다고 생각하다니.”


범주는 볼이 움푹 패이도록 깊게 담배를 빨아 당겼다. 담배 끝이 반짝하고 타올랐다가, 내뿜는 연기와 함께 차차 식어갔다. 범주는 오피스텔의 빈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말을 잇는다. 


“근데, 1602호도 사투리 쓰던데. 고향 어디?”

“경주요.”

“오, 역시. 난 울산 J동에서 나고 자랐잖아. 1602호도 알지? J동. 경주까지 차로 거의 30분이면 가는데니까. 거의 고향 동생이네. 이것도 인연인데, 전화번호나 받아둘까.”


민기의 손에 어느새 범주의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 범주의 휴대전화는 본래의 부피보다 조금 더 도톰했는데, 가죽 지갑 케이스가 화면 반대 방향으로 접혀 있어서 그랬다. 민기는 범주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다시 봐도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 사이의 나이 같았다. 어울리지 않는 휴대전화 케이스였다. 


“케이스가 엄청 레트로한 느낌이 있네요.”


민기는 에둘러 그의 올드한 취향을 비꼬는 말을 했다. 언제봤다고 반말에, 선 넘는 질문들까지. 그런 지적 정도는 받아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에 가시가 있는 사실을 상대방이 알아차린다면? 그런 의도가 전혀 아니었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민기는 범주의 눈치를 살폈다. 


“아, 그래? 역시 우리 명문대 동생한테는 레, 뭐? 레코드 같은 느낌이나 이런 단어 사용부터가 다르네. 칭찬 고맙다. 나중에 기회되면 하나 사다줄게. 지하철 역 앞에서 샀는데. 동생 휴대전화 기종이 뭐지?”


민기의 말이 의도를 튕겨낸 채 범주에게 입력됐다. 민기는 물 속의 물고기처럼 잠시 입을 소리 없이 뻐끔거리다가, 이내 닫았다. 뭐가됐든, 범주의 만난지 15분도 되지 않은 시간만에 ‘고향 동생’이 되어버린 민기는, 여전히 범주가 낯설다. 그와 알고 지낸 절대적인 시간,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하지만, 뭐랄까, 민기는 범주에게서 다른 문화를 가진 외국인을 대하는 것 같은 막연한 거리감을 느꼈다. 단단하고 큰 몸집으로 타인을 압도하지만, 초식 동물 같은 눈을 가진 사람. 민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읽어낼 수 없는 복잡성을 범주에게서 느낀다. 옆에 나란히 선 채 먼 마음의 간극을 느끼며 민기는 꾸역꾸역 자신의 전화 번호를 입력해 나갔다.


범주는 태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휴대전화를 받아들었다. 민기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 ‘미-‘까지 소리를 내었는데, 범주는 이름대신 1602, 라는 숫자를 입력하더니 휴대전화 케이스를 탁, 소리나게 닫았다. 범주는 그럼 이만, 하더니 정작 자신의 이름도, 전화번호도 남기지 않은 채 뒤 돌아 오피스텔 입구로 향했다. 민기는 벙찐 상태로, 범주의 슬리퍼가 아스팔트에 사정없이 문질러지며, 쉭-쉭- 닳는 소리를 내며 멀어지는 것을 지켜봤다. 


>> 4화에서 계속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암사자입니다. :-)

2022년 여름에 완성한 장편 소설 <우럭 장례식>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4화까지는 브런치와 포스타입 두 곳에서 무료로 연재하고,

5화부터는 '포스타입' 플랫폼의 유료 결재 기능을 통해 

편 당 200원으로 유료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완결까지 읽어도 커피 한 잔값!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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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암사자북스'를 통해 발간 예정인 <우럭 장례식>의 종이책을 만드는 인쇄비에 보태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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