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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암사자 Dec 30. 2022

[소설] <우럭 장례식> 4. 연락


SNS에서 유행한다는 레시피대로 민기는 열라면에 순두부를 넣어 끓인 라면을 연우와 함께 아침겸 점심으로 나눠 먹었다. 5월 초인데도 이른 더위가 기승이었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민기는 에어컨을 아주 잠깐만 켤까, 고민했지만 자동이체로 걸어둔 지난달 관리비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채 통장에서 빠져 나가는 바람에 이번 달은 허리띠를 꽉 졸라매야 하는 상황인 것을 기억해 냈다. 둘은 선풍기 한 대를 앞에 두고, 미세하게 바람 각도를 조정하며 땀을 말렸다. 하물며 빨래도 잘 마르려면 3cm씩은 띄워져 있어야 한다는데, 그런 와중에도 민기는 연우를 자신 쪽으로 바짝 끌어 당겨 안았다. 그들은 비효율적으로 서로에게 밀착해 더위를 말렸다. 민기는 연우와 함께라면 이대로 무더위가 자신을 집어 삼켜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녹아내릴 것 같은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휴대전화 진동음에 민기와 연우의 시간에 미세한 실금이 갔다. 민기의 다리를 베고 누웠던 연우가,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집어 민기에게 건넸다. 민기는 아주 느린 속도로 휴대전화 화면을 켰다. 


‘보나마나 엄마겠지.’


민기의 어머니는 민기가 경주를 떠나 서울에 오고 나서도, 여전히 같이 살고 있는 것처럼 시시때때로 연락을 해 그를 간섭하곤 했다. 민기는 어머니의 연락이 귀찮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외동 아들인 민기를 여전히 10대 청소년처럼 대하고 있었고, 때론 무뚝뚝한 남편에게선 채울 수 없는 외로움을 민기를 통해 대신 메워보려 하기도 했었다. 한 걸음만 떨어져서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당사자가 되면 미묘한 불쾌감 정도로만 느끼게 되어 민기는 어머니를 완전히 밀쳐내지 못하고 언제나 그 연락에 성실히 답했다. 적어도 어머니는 자신에게 하나뿐인 다정한 어머니였고, 그 기대에 어긋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민기의 답안지엔 있어선 안 될 것처럼 느껴졌다. 연우와 처음 동거를 하기 시작했을 때엔, 민기의 어머니가 남긴 메시지 때문에 오해가 생겨 한참이고 해명해야 되는 때도 있었다. 


- 다음주에 서울가면 맛있는 거 먹고 오랜만에 데이트 가자♡


연우는 바람을 피면서 자신을 속이려 ‘엄마’로 저장해둔 것 아니냐며 민기를 추궁했고, 억울한 민기는 ‘우리집은 원래 그랬다’고 했다가, 가족 없는 연우의 설움을 폭발시켜버렸다. 연우는 ‘그래, 나는 부모님이 없으니까 이런 얘기를 할 조건도 안된다는거지’하며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덕에 그들은 하루종일 좁은 집에서 등을 돌리고 휴대전화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민기는 얼마 뒤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자신의 여자친구가 ‘엄마’가 보낸 메시지 때문에 토라져 버린 얘기를 푸념처럼 털어놓았다. 앉아있던 동기 중 하나가, ‘도대체 무슨 메시지인데?’라고 물어 민기는 어머니가 보낸 메시지를 보여줬는데, 동기가 과장된 동작으로 헛구역질을 해가며 토할 것 같다고 표현한 적 있었다. 민기는 그 날 처음으로 자신의 어머니가 다른 집과는 다른 유별난 애정 표현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해와 행동 사이엔 우주만큼 먼 간극이 있다. 그는 불편에 무뎌지는 편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은 꽤 견딜만한 것이었다. 


연우의 눈치를 살피며, 어머니의 답장을 확인하려던 민기는 급속도로 피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메시지 앱을 클릭하고, 새로온 메시지가 진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발신번호를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의 메시지였다. 


- 초코, 흰색임.


숫자뿐인 발신인은 마치 자신과 매일 연락이라도 하는 사이처럼 느닷없이 본론만을 꺼내왔다. 초코는 흰색이다. 그럼 화이트 초콜릿을 얘기하는 건가. 아니다. 민기는 문자의 발신인을 알 것 같았다. 구찌 슬리퍼를 신은 남자. 그는 옆집 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민기는 그렇지 않아도 더운 날씨에, 성가실 것이 뻔한 대화를 오래 나누고 싶지 않았다. 


-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그 때 뵈었던, 같은 층 분 맞으시죠? 옆 집 개가 흰색인 것은 몰랐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 


1분도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 1604호 개 산책하다가 들어가는 거 봄. 초코인데 흰색. 주인 싸이코인듯. 개는 초코 먹음 죽는데, 이름을 그렇게 지었어. 심지어 갈색도 검은색도 아닌데.


초콜릿이 개들에겐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을 민기는 원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에 이름 붙이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은 없었다. 누워 있는 연우에게 민기는 물었다. 개 이름이 ‘초코’인건 잔인한 일일까. 연우는 자신의 휴대전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한다. 


“어머, 세상에. 생각해보니 그렇긴 하다.”


민기는 연우의 긴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내린다. 머리카락이 날리며, 향긋한 냄새가 퍼진다. 예고 없이 도착한 문자 메시지에 찌푸려졌던 민기의 인상도 누그러든다. 딱히 답할 말도, 말을 이어나가고 싶은 의지도 없어 마지막 메시지는 무시할 작정이었는데, 범주로부터 메시지가 이어졌다. 


- 혹시, 대학교 친구들 중에 영어 과외 할 사람 있나? 

- 과외 할 사람이야 많지만… 저도 과외 하고 있기도 하고. 영어 과외는 왜요?

- 내가 배우려고. 근데 나 영어 알파벳부터 다시 해야 하는 완전 초보. 그래도 괜찮?

- 뭐… 그건 상관 없을 것 같은데요. 


“과외?”


연우는 몸을 일으켜 앉아, 민기가 온 신경을 집중해 바라보고 있는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민기는 지난번 집에 불쑥 찾아온 같은 층 남자에 대해, 같은 날 흡연 구역에서 나누었던 그의 무례한 태도와 말투에 대해, 그리고 오늘, 갈색일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흰색인 초코와, 갑작스럽게 영어 과외를 찾고 있다는 남자에 대해 말했다. 연우는 여섯살 아이를 달래듯 민기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연우의 웃음 소리에 민기도 퍽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우리, 지금 상황이면 일을 더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민기는 연우가 ‘우리’ 하고 말 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연우가 나와 너로 구분짓지 않고, ‘우리’로 묶어 이야기를 시작하면 가슴이 조금 더 세게 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직 20대 초반이지만, 한 가정을 책임지는 어엿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 책임을 지기 위해 노력하는 자신을 상상할 때면, 하지도 않은 노력을 놓고도 자부심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민기가 ‘우리’라는 단어를 특별하게 여긴다는 것을 연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민기 보란듯 티셔츠 목 부분을 한 손으로 잡고 필요 이상의 큰 동작으로 펄럭였다. 나머지 한 손으론 손부채를 부쳤다. 몸으론 온통 더위를 표현하면서도, 그녀는 민기를 향해 빙긋 웃는 것을 잊지 않았다. 민기의 시선이 연우의 웃음에 닿았다가, 드러났다가 감춰지길 반복하는 하얀 속살에 가닿았다. 학교를 가거나, 아르바이트나 과외를 하는 시간 빼고는 연우와 거의 붙어 있다시피 했지만 민기는 연우에 대한 욕심이 매일 새롭게 피어나는 것만 같다. 민기는 연우를 자신의 앞으로 바짝 끌어 당겨 안고, 연우의 헐거운 티셔츠 사이로 자신의 손을 넣었다. 연우는 서서히 녹아가는 사물처럼 투명하게 미끌거린다. 민기의 손끝에 말캉하고 촉촉한 감촉이 전해 온다. 연우의 목과 어깨 사이에 머리를 부비는 민기에게 연우는 휴대전화 캘린더를 꺼내 보인다. 


“우리 200일은 여기, 내 생일은 여기. 그리고 요즘 우리 너무 덥고 힘드니까.”  


연우는 상대가 말하지 않아도 바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는 재능이 있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바라는 것을 직접 말하지 않고, 상대가 스스로 행동하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민기는 늘 연우와 함께 자발적인 본인의 의지로 새로운 일들을 펼쳐 나간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에 푹 빠져들 때면, 그는 여전히 어린 외동 아들로 품에 안겨 있는 자신의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연우와 함께 하면 그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약같은 해방감에 취해 그는 찝찝하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는 차치하기로 했다. 지금의 상황이 최선이라고. 그저 지금은 약간 불편한 것 뿐이라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연우와 함께 조용히 잘 지내다가, 졸업하고 부모님이 그렇게 바라던 대기업 취직도 자연스럽게 해내면 그만일 일이었다. 그 때 쯤이면 정말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추가 수입을 벌 수 있다면, 민기는 ‘우리’의 200일을 멋지게 만들 수도 있고, ‘우리’가 함께 보낼 연우의 생일에 좋은 선물을 사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지금처럼 더위를 참아가며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민기는 상상한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밤, 몸이 떨릴 정도로 추운 공기를 품은 방에서, 보송하고 차갑게 마른 이불 아래 연우와 함께 단단하게 얼어 붙어 가는 것을. 겨울처럼 박제되어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시간을 꿈꿨다.


- 주 2회, 하루 2시간, 한달 60.

- 네, 형님. 저 영어 잘 가르칩니다. 언제부터 할까요?



>> 5화에서 계속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암사자입니다. :-)

2022년 여름에 완성한 장편 소설 <우럭 장례식>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4화까지는 브런치와 포스타입 두 곳에서 무료로 연재하고,

5화부터는 '포스타입' 플랫폼의 유료 결재 기능을 통해 

편 당 200원으로 유료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완결까지 읽어도 커피 한 잔값! ㅠㅠ!!)

차곡차곡 구독료로 받은 돈은, 

2023년 '암사자북스'를 통해 발간 예정인 <우럭 장례식>의 종이책을 만드는 인쇄비에 보태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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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사자 <우럭 장례식> 읽으러 바로가기!(포스타입 플랫폼으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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