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하다 돌봄을 생각하다
내가 활동지원사야? 아니다. 다 늙었으니 요양보호산가?
아내의 날세운 목소리가 뒷덜미를 서늘하게 했다. 이만한 타격감은 혼수를 준비할 때 이후에 처음이다 싶다. 아내는 웬만해선 화를 내지 않는다. 설사 화가 나더라도 며칠 묵언수행하거나 짜증을 담은 잔소리 정도다. 그런 아내가 이렇게 정색하며 리듬감 없는 톤으로 말하니 눈도 못 맞췄다. 좀 무서웠달까.
장애로 몸이 자유롭지 않으니 혼자 하는 출근 준비는 매번 격하게 운동을 하는 것 같다. 끙끙 대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양말까지 신자면 입이 바싹 말라 군내가 날 정도다. 한데 이날은 유독 바지에 발을 끼여 넣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바지가 자꾸 말려서 한 손으로 끌어올리자니 숨을 헐떡거렸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목이 타고 짜증이 밀려 올라 거실을 향해 투덜댔다.
당신이 도와주면 금방 하잖아. 뭘 하는데?
혼자 하면 40분이 걸리지만 아내가 조금만 도와주면 10분이면 출근 준비가 끝났다. 특히 오늘처럼 날이 흐리면 움직임도 더 둔해지고 통증도 심해져 컨디션이 최악이란 걸 아내도 아니 분통이 터진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대꾸도 않으니 화가 났다.
아내가 들어오며 "왜 혼자도 잘하면서 짜증인데?"라고 미소 지었다. 웃어? 힘들어 죽겠다고 투덜거려도 못 들은 체하더니…. 딱히 아내가 잘못한 일은 아니지만 괜히 서럽기도 해서 노려 보았다.
"당신이 해주면 쉽잖아. 샤워도 혼자 하고 나와서 힘들어 죽겠는데!" 아내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내가 활동지원사야? 아니다. 이젠 늙어서 요양보호사려나? 여보, 나도 아침 준비로 바빠. 알잖아? 샤워는 당신도 혼자 할 수 있잖아? 느리긴 하지만 그건 천천히 하면 될 일이고. 아냐? 장애인을 무조건 돕는 게 배려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거라며? 이게 나한테 이렇게 화를 낼만한 일인 거야? 나 갑자기 월급도 안 받는데 활동지원사 된 거 같아 기분이 참 거시기한데?"
아내 말이 다 맞으니 대꾸도 못했다. 불편한 장애인이라고 무조건 다 해주는 게 배려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하면서 성취감을 갖게 해주는 것이 함께 살아가는 길이라고 강연에서 내가 빼놓지 않고 늘 하는 말이었다.
한데 나도 인간인지라 정작 할 수 있지만 유독 컨디션이 꽝인 이런 날은 도와주길 바라게 되기도 한다. 혹시 애교 섞인 부탁을 했더라면 아내는 못 이기는 척 도와줬을까?
사랑은 헌신이 아닌 것임을 안다. 아내가 전적으로 나를 위해 살기 바라지 않으면서도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니 아내에게 팔 할쯤 의지하게 돼서 내 힘듦을 얼마간 알아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오늘의 사태를 만들고 말았다.
아내는 돌봄 제공자가 아니라 반려자다. 장애를 알아봐 주기만 바라게 된다면 사랑도 이기적이 되지 않을까. 오늘, 나의 장애로 사랑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