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니? 팀장아?
직장이란 자고로 숨었든 대놓고 지랄하든 빌런이 존재하는 곳은 분명하다. 그런 빌런이 동료라면 먼산 응시하고 무시를 내공으로 펼치면 되겠지만 상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굽힘의 자세를 가급적 빨리 터득해야 한다. 본인 컨디션에 따라 결재를 좌지우지 해대면 그 피곤함은 이루 말할 수 없으니.
그런 빌런에게 웃음을 날리며 멕일 수 있는 만렙 강철 심장이 아니라면 그저 닥치고 '척' 해야 살아남을 수 있어서 특히 나처럼 힘없고 빽 없고 늙기까지 한 평직원이라면 생존 기술이 바로 굽힘이다. 암만!
드라마 <모텔 캘리포니아>에서 지강희는 그랬다. '싫은 사람과 일하지 않는 것이 인생 최고의 사치'라고. 그러자고 퇴사를 한건 아니지만 결과로는 싫은 사람과 일하지 않게 되었으니 나도 사치를 누리는 걸까?
12년 전, 마흔세 살 늦깎이로 장애인복지관 사회복지사가 됐다. 체대를 졸업하고 애니메이터, 디자인 강사를 하면서 16년 간 열혈 직장러로 피곤과 다크서클을 발밑까지 끌어내리고 살다가 문득 파란 하늘은 천국에 가서나 보겠다 싶어 그만뒀다. 나는 살고 싶었나?
장애인이면서 스스로 장애인이라고 의식하지도, 장애인과 어울려 본 경험도 딱히 많지 않아서 장애인복지관 사회복지사로는 대부분의 날들을 우왕좌왕했다. 신기하게도 장애인복지관에 장애인 직원은 나 하나라서 더욱 카오 스였달까.
반면 의욕은 넘쳐 이런저런 일을 해보고 싶어 늦깎이 신입의 자세는 잊고 이것저것 해보자고 들쑤시니 팀장이 조용히 불렀다.
"왜 그래요. 진짜! 그냥 하던 일이나 잘하자고요. 괜히 일 벌여서 일 만들지 말고."
아, 그런 거였구나. 일이 많으면 일나는 거였구나. 그렇게 업무는 잘 모르고 나이만 많은 나는 주눅 드는 날만큼 의욕도 줄어 서 하던 일만 잘하는 사회복지사로 거듭날즈음 새로운 곳으로 이직을 하게 됐다.
아뿔싸! 새로운 곳에 왔으니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우를 범했다. 새로운 곳이라도 이름만 다른 장애인복지관인 것을 깨닫지 못하다니. 게다가 한술 더 뜨는 팀장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해봤는데 그거 안 돼요.", "별론 데요? 그건 옛날 방식이에요. 뭘 잘 모르시네요."
여보세요. 혹시 사회에 불만이 많아요? 염세주의잔가요? 왜 이렇게 부정적이세요?라고 되받아치고 싶지만 역시 지혜로운 빌런 대처법은 "네. 그렇군요." 아니겠는가. 또 주눅 드는 날만큼 의욕도 줄었다.
사실 사회복지사라고 하면 “와, 좋을 일 하시네요.”라는 칭찬 릴레이가 이어지는데 이 좋은 일의 갭이 커도 너무 크다. 사회복지사는 전문가로 대접받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돌봄 노동자로 대접하는 터라 현장에 있는 사회복지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이 '좋은 일'을 버리고 다른 일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신세가 되고야 마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힘겨운 장애 가족을 위해 여행을 지원하고, 생필품 지원을 위해 바자회를 열어 장사꾼도 되고, 후원처 개발에 외판원 취급도 받는다. 지역 내에서 지역 주민으로 살 수 있도록 편의시설을 장애인을 대신해 점주들에게 부탁하고, 무엇보다 공적 서비스를 확보하기 위해 관공서에 을의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또 반찬이나 생필품을 들고 가가호호 뛰어다녀야 하고, 가족도 챙기지 않는 생일상을 대신 차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뿐일까?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에 몸과 영혼을 갈아 넣는다. 그래서 하던 일을 하는 게 신간 편하다.
사실 하던 일이라도 그냥 하면 되는 게 아니라서 기안, 계획서, 품의서, 결과보고서 등등 써야 할 서류가 적지 않으니 의욕이 만렙으로 넘치는 게 아닌 이상 역시 하던 대로 해야 편하다.
작년과 같은 사업이라면 최소 몇 년 전과 같은 사업일 확률이 높다. 그러니 키보드 위를 Ctrl+C와 Ctrl+V가 우아하게 미끄러질 수 있다. 반복되는 사업은 그렇게 우아함의 반복이라서 최소한의 터치로 빠르게 해결할 수 있다면 칼퇴라는 단꿈도 가능해진다.
"아니, 지금 몇 년 찬데 아직도 이런 기본적인 걸 틀려요?"
그날, Ctrl+C와 Ctrl+V를 애정하며 기안을 올렸다. 우아한 터치를 했다는 건 쌩판 새로운 사업을 벌이지 않았으며 이미 마무리된 사업, 그러니까 결재가 팀장을 거쳐 사무국장과 관장까지 끝난 사업을 날짜를 포함해 몇 가지만 바꿔서 올린 것이라서 틀렸다고 다시 쓰라고 이 지랄 떠는 상황이 납득이 안 된다.
게다가 아니 몇 년 차를 들먹이는 모멸감을 얹어 돌려주는 기안을 받아 들고 심히 빡이 쳤지만 혹시? 찝찝함에 받아 들고 세포분열을 찾아내려는 연구원처럼 현미경을 들이대고 자간의 틈새까지 샅샅이 들여다보지만 없다! 저번 거와 똑같다. 뭐지? 틀린 게 없는데 틀렸다고 하니 은근 열패감이 뽀나스로 얹힌다.
없는데? 어디가…. 이거 저번에 관장님까지 오케이 나서 결재 끝난 거 날짜만 바꾼 거라서야…. 진짜? 그럴 리가. 내가 이걸 결재했다고? 눼눼 너님이 그러셨어요. 왜 뭐가 문젠데? 결국 문장이 매끄럽지 않다는 시답지 않은 변명을 뒤로하고 나는 문장을 다듬었다. 이 빌런 시키를 어쩌면 좋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면, 너님이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는 거니 그렇게 우기면 너님의 입맛은 왜 한결같지 않냐고 내가 물을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너님은 칼퇴고 나는 야근하면서 수당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아라도 해야 되는 건가요?
우리 입맛은 식당에선 까다롭게 굴어도 회사에서는 한결같으면 안 될까요?
"눼? 진짜요? 저한테는 안 그러시던데…. 작년 거 그냥 복사해서 쓰라고 하시던데요?"
팀장의 변심을 털어놓으니 여자 동료가 화들짝 놀란다. 역시 직장에서 나의 빌런이 모두의 빌런은 아니라서 함부로 뒷다마 까다가는 역공을 당할 수도 있음을 확인하면서 그냥 굽힘을 신공을 발휘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