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점도 괜찮아?

너님은 괜찮을지 몰라도

by 암시랑


드륵드륵 드드드드


'○○ 영어 학원 출금 확인'이란 문자 알림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학창 시절 화장실 뒤에서 뜯기던 삥을 뜯기는 기분이 들면서 며칠 전, 분노게이지를 머리끝까지 올렸던 일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발적 퇴사처럼 쫓겨난 후로 눈치를 있는 대로 보면서 그에 버금가게 이력서를 쓰고 있지만 면접 보라는 곳이 없어서 무기력하게 뻗어있는 있는데 아들이 들어서면서 아내에게 속삭인다.


"엄마, 30점도 괜찮아?"


들었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아니 들어서는 안 됐지만 문제의 그 '30점'은 귓속을 헤집고 파고들었다. 30점? 이런 미친Χ. '너 같으면 괜찮겠냐?' 속이 부글부글 들끓어 아이 얼굴에 한바탕 퍼붓고 싶었지만, 아내와 눈이 마주쳐 그냥 소파에 몸을 눕혔다. 눈을 감자 30이란 숫자가 *비문증처럼 떠다녔다.


고등학교 첫 시험은 진로에 중요하니 준비를 잘하라고 이미 여러 번 말했다. 게다가 아빠는 부자도 아니라서 멀리 가면 못 보낸다고 은근한 협박도 했었는데 30점이라니. 고작 그거라니. 10년도 넘어 이미 푹신함을 잃은 소파라 몸을 뒤척이자 허리에 통증이 밀려왔다. 저절로 끙 소리가 났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누워 있는 나를 본 아내는 "당신, 요즘 너무 예민한 거 아냐?"라고 속삭였다. 그 말에 더 속이 상해 한마디 하려다, 달리 틀린 말도 아니라 입을 다물었다.


팔자 편한 은퇴는 물 건너 간 마당이라 재취업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한데 나이가 적지 않아 쉽지 않을 건 예상했지만, 이렇게 면접조차 못 볼 줄은 몰랐다. 딱히 이직 준비를 한 것도 아니고, 거창한 은퇴 계획도 없이 갑자기 쓸모없는 사람이 된 거 같아 들숨 날숨이 동시에 한숨이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직 학업을 마치지 않은 아이가 둘이나 있고, 노후 준비는커녕 모아둔 재산도 없는 형편이라 조급함이 적지 않았다.


이런 내가 아내도 답답했는지 "할아버지는 지갑을 열고, 아버지는 입을 닫아야 아이가 성공한다는데, 당신이 계속 윽박지르니까 거리감만 생기는 거야. 그래도 이번에는 좀 했으니까 봐줘."라며 아들을 감쌌다.


"돈도 못 버는데 30점 맞자고 그 비싼 학원을 보내야 해?"


벌떡 일어나 따지듯 물었지만 아내는 그마저도 안 다니면 어쩌겠냐고, 부모가 돼서 할 수 있는 한 해야 하지 않겠냐고 답답해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공부는 할 놈이 하는 건 별반 다르지 않을 텐데 아이는 관심 없는 공부에 스트레스를 받고, 나는 학원비 상납하며 스트레스받는데 도대체 이걸 왜 계속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공부는커녕 숙제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학원장에게 종종 숙제를 잘 봐달라고 전화를 받는데도 아내는 학원을 빠지지 않고 잘 다니는 게 어디냐고 하는 통에 상납 문자는 화를 더 부채질했다.


그럴 리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문득 한여름 소나기처럼 작대기가 쏟아진 시험지를 보면서 조금은 상처를 받았으려나? 하고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 아이 방을 흘끗거렸다. 냉랭한 아빠 때문에 코 빠트리고 있을 줄 알았더니 게임을 쳐하고 있는 모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쌍욕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쿠션감이 전혀 회복되지 않은 소파는 엉덩이를 불편하게 만들며 허리를 곧추 세웠다. 뜻하지 않게 위압적인 자세로 훈계를 시작했다. "아빠가 시험 전에 분명히 말했지? 첫 시험은 중요하니 잘 준비하라고?" 기본적으로 얇은 목소리를 타고났지만 최대한 낮게 깔았다.


"나 한다고 한 건데? 그리고 저번보다 좀 올랐어. 엄마한테 물어봐."


아들은 눈을 얼마간 동그랗게 떴다. 그 순간, 뒷목이 뜨거워졌다. 한 번 부러진 목이라 그런지 쉽게 뒷목이 뻐근함이 타고 올랐다. 할 만큼 했다고? 하루 20시간 하던 게임을 19시간으로 줄인 것 같은 미미한 체감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고등학교 진학하고 첫 시험 아닌가. 누가 봐도 1시간이 아니라 19시간을 줄이는 게 상식적일 텐데 얘는 너무 당당해서 내 목이 또 나갈 뻔했다.


부모가 애쓴다는 걸 알아주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최소한 아빠가 중증 장애인이란 옵션이 있으니 지 살길 지가 찾으려면 더 열심히 했으면 싶은 바람이 있다. 이렇게 힘들게 벌어서 학원에 헌금처럼 바치고는 싶지 않았다. 학원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좋은 대학이 아이들의 인생을 순탄하게 인도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십자가를 지게 만들지는 않으리라는, 아니 지더라도 조금은 가벼운 십자가일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성적보다는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해 왔는데 30점에 그 가치관이 흔들렸다.


아이가 게임을 하지 않고 열심히 했더라면 정말 30점이어도 괜찮았을까? 만약 초조하게 이력서를 쓰는 지금이 아니었다면 괜찮았을까? 아이 인생을 두고 내 인생이 흔들리는 기분이 든다.



비문증(飛蚊症, Floaters): 눈을 감았을 때 눈앞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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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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