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께 자격증을 따야

하고 싶은 일에는 자격증이 필요하지 않은데요?

by 암시랑


퇴사를 해도 백수가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28년 간 열심히 노동을 해왔던 터라 얼마 전, 쫓기듯 복지관을 나왔어도 곧 다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쉽지 않았다.


그동안 부동산이나 주식, 코인 등 재테크 광풍이 불어도 엄두도 못 냈다. 뭐, 용기는 있으되 돈이 없으니 투자 건 투기 건 언감생심일 뿐이라서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을 목숨줄로 알고 살았다.


한데 재취업은 신기루처럼 점점 보이지 않으니 배신하지 않는 월급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고 있다. 대미지가 실로 어마무시하다.


사실 나는 언제라고 딱히 정하지는 않았지만, 일을 그만두면 영화 <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 잔>에 등장하는 '요다카' 카페처럼 바다가 코앞에 있는 곳 어디쯤에서 책방을 싶었다. 펼쳐진 바다에 떠있는 장면은 아플 정도로 가슴이 설렜었다.


아내도 '뭐, 그때쯤은'이라며 지지인 듯 격려인 듯 딱히 반대하지는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은퇴가 아니라 재취업을 해야 하는 퇴사가 돼버렸다.


이 마당에 책방을 하겠다고 하면 철없는 남편이 될게 뻔해서 닥치고 사력을 다해 이력서를 쓰면서 문득 개그맨 오정태가 개그 프로에서 고함치던 장면이 떠올랐다. 아마 <개그야>였던가?


능력 없는 친구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하다가 답답해지자 "뭣하냐? 그냥 자격증을 따야?!"라던 핏대를 세우며 호통을 치던 모습이었다. 나한테 하는 소리 같고 그러니 나도 그래야 하나 싶고, 이제라도 기술을 배우든지 해야 하나 싶어 우울해졌다.




부르르 드륵드륵~


핸드폰이 요란하게 떨었다. 잠시 후 또 부르르 드륵드륵, 연달아 서너 개의 문자 알림이 떴다. 얼마 전, 실업급여를 신청하면서 반강제적으로 구인 알림을 등록해야 했는데 공단에서 보낸 장애인 모집과 장애인 실업교육에 관련한 알림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했다. 그러면 그렇지. 모두 조립 생산이나 매장 정리다. 나같이 상지 불편한 휠체어 장애인에겐 이런 단체 문자는 그저 공무원의 형식적인 일에 불과하다. 내 이력과 경력에 맞는 일자리 알림을 보낼 순 없는 걸까?


자격증도 많은데 취업을 하지 못하니 둘 중에 하나가 아닐까. 중증 장애인이거나 나이가 겁나 많거나. 그렇다고 이 나이에 오정태 말만 믿고 자격증을 또 따기도 그렇고. 이젠 스치는 바람에도 내 이름도 잊어먹을 판인데 새로운 자격증이라니….


갑자기 장애를 얻고 나서 제일 큰 변화는 극 E의 성향에서 극극극 I로 변한 거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 틈새에서 빛나던 인싸였지만 이제는 그런 자리에선 기를 몽땅 빨려 어지럽다. 그래서 '요다카'는 내 남은 인생이 머물고 싶은 유토피아였다. 최대한의 한적함과 최소한의 관계가 있는 곳, 그런 것들의 자유로움이 넘치는 책방지기를 꿈꿨다.


하지만 정말 원하는 일인지 확신할 수 없어서 책방창업 강좌를 듣고, 복지관에서 에세이 출판 사업을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책방지기'의 주변만 맴돌며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건 아마도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호기롭게 창업하고 1년 만에 쫄딱 망했던 전력이 있어 두려웠을지도.


그때는 8년 넘게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일하면서 창작 애니메이션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당시 신혼집을 빼서 시작했지만 일하는 것과 비즈니스 하는 것은 다르다는 걸 미처 몰랐다. 공공연하게 요구하는 접대를 하지 않다가 문을 닫았다. 나는 사업할 그릇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꿈만 꾼다. 책방지기는 아무나 할 수 있겠지만, 내가 아무나가 될 수 없는 현실이 결국 이력서에 매진하게 만들지만 지금 필요한 자격증인지, 앞으로 필요한 자격증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책방지기도 자격증이 필요할까?


먹고사는 데 자격증이 필수인 시대라는 건 알지만 내 나이 55세, 오정태의 고함에 주눅이 드니 은퇴는 참 멀고도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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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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