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인간들의 세상에서 버티기
기대와는 다른 뜻밖에 모임이 되었다. 오랫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를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가보니 더 오랫동안 뜸했던 친구가 서넛 더 있었다. 이상하게 보일 줄 알지만 자연스럽게 활짝 웃지 못했다. 어색한 미소 정도를 지으려고 용썼다.
쉬익 힝힝힝. 휠체어를 바꾸고 나서 주행할 때는 배터리가 용쓰는 듯 이상한 소리가 났다. 좁은 실내에선 부끄럽기까지 할 만큼 크게 들렸다. 가격이 오른 만큼 부끄러움도 덩달아 오른 건 옵션이려나.
"휠체어 바꿨네? 비싸 보이는데?" 오늘 만나기로 한 친구가 말했다. "이상한 소리가 나지? 이게 마력이 세서 그런가 봐."라는 흰소리를 하고 의자를 뺀 자리로 휠체어를 밀어 넣었다.
내가 오기 전 하던 말이 끝난 건지 아니면 늦게 나타나는 내 얘기를 하던 중이었는지 눈치를 살피느라 애먼 휴대폰을 만지작 거렸다.
"너 복지관 그만뒀다며?"
역시 내 얘기 중이었군. 오래 만나지 않았던 친구 하나가 입을 떼자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던 하이에나였다는 듯 이놈 저놈 말꼬리를 물었다. '내일모레 은퇴할 나이에 뭔 퇴사냐', '애들이 몇 학년이더라', '제수씨가 일하냐? 뭐 먹고살 거냐', '로또라도 맞았냐' 등등 헤실헤실 웃으며 물고 뜯고 씹었다.
어차피 대답을 원한 물음이 아닐 테니 대답하지 않았다. 정색하자니 속 좁아 보이니 그냥 웃음을 흘렸다. 지들도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지만 저지를 용기가 없으니 괜히 걱정으로 포장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술 몇 잔 돌고 나니 내 대책 없음이 부러운 짓으로 수렴됐다.
나이 오십이 훌쩍 넘어 이제야 꼭 하고 싶은 게 생겼으니 어쩌겠냐. 어쩌다 보니 퇴사는 했는데 막막하긴 하다. 이런저런 영양가 없는 말이 오갔고 그 말 끝에 글 쓰고 책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했더니 시선이 일제히 내게 꽂혔다.
난데없이 벼락이 정수리를 때린 기분이 들었다. 내가 세상을 만만하게 본 적이 있던가? 이 놈이 나를 만만하게 보고 있음이 화가 났다.
오래 만나지 못한 친구를 만나면서도 왜 환하게 웃을 수 없었는지 이제 알았다. 잊고 있었다. P는 매사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버릇이 있다. 여전히 일관성 있게 무례한 이 녀석을 어쩌다 잊었을까.
울컥해 받아친 내 말에 갑분싸 해졌고 화제는 엉뚱하게 장례식으로 옮겨 갔다. 주변에 부고가 많아진다는 친구는 장례식장에 다녀온 이야기를 부랴부랴 꺼내 들었다.
나이 먹고 회사를 다니지 않는 일이 실패로 간주되는 세상에서 애초에 성공은 기대하지 않았으니 그저 소소한 행복이라도 챙겨야 하는데 그것마저 쉽지 않을 일이 됐다. 늙으면 입을 닫고 귀를 열라던데 그게 쉽지 않은 세상이라서 친구 사이에도 칼이 되는 말들을 서슴지 않게 되는지도 모르겠고.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거나 '나는 솔직한 거야'라며 상대의 마음을 사정없이 긁어대는 사람이 있다. 또 그걸 위로나 인생 조언이랍시고 자랑으로까지 착각하는 것들. 위로나 조언은 하는 놈 마음이 아니라 받는 사람 마음을 헤아릴 때 효과가 있지 않던가.
책을 좋아해서 읽고 쓰고 만드는 일을 하고 싶은 게 누군가에게는 어이없는 일인가 싶기도 하고. 당최 괜히 퇴사는 왜 해서는 몸도 마음도 시끄러운지 모르겠다.
P에게 긁힌 마음이 한동안 우둘투둘하게 손에 걸리적거리겠지만 재취업을 위해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고, 하고 싶던 글쓰기와 그림을 시작했다. 은퇴할 나이에 하루가 더 치열하게 살아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