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배치 됐다-1

취업이 아니라 배치라뇨? 그게 뭔 말인데요?

by 암시랑


가을 추수에 온 힘을 다해 깨타작 하고 난 뒤 떨어지는 깨만큼이나 많은 이력서를 보냈다. 체감은 그랬는데 면접은커녕 이렇다 할 회신 하나 없다. 성의가 부족한 걸까? 레간자만큼이나 소리 없이 강한 여운을 남기며 시간은 지나간다.


백수로 갈아탄 신분에 보너스같이 초조와 불안이 자리 잡았다. 손톱을 물어뜯진 않지만 눈치는 살피게 됐다. 아이스크림 하나도 당당하게 집어 들던 구구콘에서 하드로 바뀌었다. 아내는 너무 그러지 말고 마음 편하게 먹으라지만 먹는 모든 게 마음 편하지 않았다. 이물질이 잔뜩 목에 걸린 것 같이.


"이참에 은퇴했다고 생각하지 뭐."


너님은 그럴지 몰라도 나는 안 그래요. 마음은 편할리 없고, 편하지 않은 이상 은퇴라고 할 수도 없어요,라는 심정이 마음 부침을 심하게 했다. 그러다 포토그래픽 메모리가 각성된 것처럼 복지관에서 일할 때 얼핏 봤던, 복도를 쓸고 파쇄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멍하게 앉아 있거나 편하게 졸던 그들이 기억났다. 그 일은 대부분의 시간이 무기력해 보이던 장애인 일자리 사업이었다.


인내심은 5개월 만에 바닥났고 기심 어디 하나라도 걸려라,는 심정으로 신청서를 썼다. 내가 정말 이런 거라도 해야 해?라는 건방진 마음이 조금 들었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열심히 성심성의껏 이력서를 썼다. 아마 간절함도 있었겠지.


저는 이래 봬도 말이죠. 디지털 애니메이터 8년, 디자인 강사 7년, 장애인복지 사회복지사 12년 도합 27년의 경력과 내가 뭘 잘하는지, 뭘 잘할 수 있는지를 친절하게 담았다. 게다가 자부심 뿜뿜 하게 묻지도 않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까지 조목조목 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추락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직업에 귀천이 있음을 심심치 않게 목도했던 터라 이 길에 들어서면 다신 사회복지사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며칠 후, 주민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전화한 남자는 시청으로 면접을 가라고 했다. 주민센터에 접수를 했는데 시청으로 면접을 가라니, 내 이력이 나쁘지 않구나 싶어 으쓱했다. 역시 복지관에서 봤던 그런 일을 내게 시키진 않겠지 싶어 반색했다. 시청은 집에서 2분 거리, 엎어지면 코가 닿으니 더 좋았다. 8년 간 왕복 50km가 넘는 출퇴근이 주마등처럼 지났다. 바닥난 체력을 빌미로 쫓겨나듯 퇴사한 마당에 근거리 출퇴근이라니, 피로야 가라! 를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출근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김칫국을 있는 대로 들이부었다.


면접 당일, 꽤 많은 장애인이 모였다. 생각보다 경쟁이 치열해 놀랐다. 주무관 안내에 따라 지정된 자리에 앉자 긴장감이 덮쳤다. 하, 이런 면접에도 긴장이 되네, 하면서도 10명의 면접자가 돌아가며 간단한 자기소개를 듣자니 긴장감이 더했다. 마지막 면접자가 소개를 끝내자 기다렸다는 듯 면접관이 나를 지목했다.


“선생님, 컴퓨터는 잘 다루시나요?”


에? 순간 당황했다. 나름 열심히 성심성의껏 그리고 간절함을 두 페이지나 담았는데 뜬금없이 컴퓨터를 잘 다루냐니? 이력서를 안 봤나? 27년여의 경력을 자부심 넘치게 썼는데 심지어 디자인 강사 경력에다 자격증이 몇 개나 있는데 컴퓨터를 잘 다루냐니? 혹시 다른 의도로 물은 건가? 잠시 텀을 두고 면접관을 보면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지 멘털이 흔들렸다.


숨으로 고르고 면접관을 응시한 채 면접관님이 말하는 ‘잘’의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디지털 애니메이터와 디자인 강사 경력을 합해 15년이고, 정보처리를 비롯한 자격증이 7개나 있고 최근 사회복지사로 12년을 근무한 정도로는 어림없나요?라고 되물었다. 면접관의 안경 너머 동공이 흔들렸다. 그는 네? 아, 됐습니다,라며 기분 나쁜 듯 얼버부리 더니 다른 면접자에게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아, 되긴 뭐가 됐냐고 따지고 싶었다. 자격검증이 됐다는 건지, 더 이상 긴말 필요가 없다는 건지 딴 일 알아보라는 건지 대충 얼버부리는 그의 무례함에 화가 치밀었지만 뭐라고 토를 달기에는 나 스스로도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장애인 일자리에 참여하는 사람의 능력은 뻔하다는 듯한 그의 태도에 이 일로는 사회복지사 경력은 지속될 수 없음이 확실해졌다. 어쩌면 좋지?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주민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협회에 배치됐으니 연락이 오면 담당자를 만나보라고 했다. ‘배치’라니? 취업이 아니고? 역량이나 의지 그 어떤 것도 상관없이, 어떤 기준이나 설명도 없이 그냥 배치됐으니 가보라니 대략 난감이 아닌가.


일방적인 통보에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다. 조급한 마음에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지원하고 혼자 김칫국을 마셔대고 했으니 내 잘못이었다. 장애인 일자리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하지만 나이 많은 중증 장애인 사회복지사는 여전히 어디에서도 필요치 않는 게 현실이라서 비굴하지만 담당자를 만나봐야 하나? 이제 선택해야 한다.



포토그래픽 메모리: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마치 캠코더로 녹화하듯이, 또는 사진을 찍듯이 기억할 수 있는 능력. 현 학계에서는 실존하는 증상인지 증명할 길이 없다고 알려짐.(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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